2013-12-13

5. 백두산밀영



우리가 만강부락을 떠난것은 철늦은 감자꽃이 한창 피여있던 8월말경이였다. 수확의 계절을 고대하던 화전들에서는 보리가을이 바야흐로 시작되고있었다.
대렬은 묵묵히 남으로 흘러갔다.
나의 전우들은 련대정치위원 김산호로부터 애젊은 전령병들인 최금산이나 백학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백두산지구진출이 가지는 의의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백두산은 군사지형학적견지에서 볼 때 일부당관 천부막개한 천연요새라고 말할수 있다. 일부당관 천부막개란 한사람이 지키는 관문을 천사람이 열지 못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아군이 지키기에는 유리하고 적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유격전을 확대하는데서 백두산보다 더 적중한 기지는 없었다. 고려의 윤관과 리조의 김종서도 바로 이 백두산지구를 타고앉아 보국개척의 중임을 수행하였다. 남이장군 역시 백두산부석우에서 천하를 평정할 웅대한 꿈을 꾸었다.
백두산이야말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지상제일의 보루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에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꾸리고 국내진출을 강화한다고 하여 지난날 만주땅에서 모처럼 개척해온 활동무대를 버리는 일은 있을수 없었다. 우리는 백두산을 거점으로 삼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지경을 들락날락하며 종횡무진의 싸움을 벌리자는것이였다.
우리는 천험의 백두산을 군사적요새로 중시하였을뿐아니라 그것이 지니고있는 정신적의미를 또한 특별히 중대시하였다.
백두산은 우리 나라 조종의 산으로서 조선의 상징이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사의 발상지이다.
조종의 산 백두산에 대하여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우러러 보았는가 하는것은 백두산 장군봉밑의 천지기슭바위의 비석에 새겨진 《대태백 대택수 룡신비각》이라는 글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나라의 생존이 심히 우려되였던 20세기초에 대종교나 천불교의 관계인물인 천화도인에 의하여 세워진 그 비석에도 밝혀져있는것처럼 백두산을 지키는 천지의 룡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것을 기원하고있었다.
백두산에 대한 숭상은 곧 조선에 대한 숭상이였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였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백두산을 조종의 산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숭상해온것은 조선민족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였다. 고구려령토확장시대의 부분노나 을두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이장군이 지은 웅건장중한 시구들을 외우면서, 윤관과 김종서의 보국개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백두산에 깃들어있는 선렬들의 애국혼에 감동되고 매혹되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마음속에 점점 더 높이 솟은 백두산은 조선의 상징인 동시에 광복거사의 상징으로 되였다.
백두산을 타고앉아야만 민족의 모든 력량을 항쟁의 마당으로 불러낼수 있고 그 항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할수 있다는 사상은 1930년대 전반기의 항일혁명투쟁이 가져다준 총화이며 응당한 귀결이기도 하였다.
만강에서 백두산으로 가려면 되골령을 넘어야 한다. 되골령은 두메의 늙은 포수들조차 향방을 잘 가늠하지 못하는 태고연한 처녀림들로 덮여있었다.
석달전에 선발대의 사명을 띠고 장백에 파견되여가서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김주현이 길잡이가 되여 대오를 안내하였다. 그가 인솔한 소부대는 백두산쪽에 나가 그 일대의 적정과 지형들을 정찰하고 주민동향들을 조사하면서 알맞춤한 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하는 한편 부대의 진출통로를 성과적으로 개척해놓았다.
우리는 만강천줄기를 따라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가다가 되골령의 울울창창한 원시림속에 스며들었다. 계절을 따지면 여름이 끝나지 않은 때였으나 고산지대의 넓은잎나무들에는 단풍이 들고 선기가 났다.
우리는 되골령을 넘는 이 행군길에서 26번째의 국치일을 맞이하였다.
만강을 떠난 우리가 신들메를 갈아대며 남하행군을 다그치던 그 시기는 또한 제7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일본 륙군대장 미나미가 서울에 들어서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우리는 무송현성전투를 치르기 전에 신문지상을 통하여 미나미가 우가끼의 뒤를 이어 새 총독으로 임명되였다는것을 알고있었으며 그가 우리들과 엇비슷한 때에 조선에 들어서리라는것도 짐작하고있었다.
미나미의 서울행차와 조선인민혁명군의 백두산진출이 같은 때에 있게 된것은 우리들의 심리에 미묘한 자극을 주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후안무치한 강도행위였다는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네들은 처음부터 그 강점을 합법적이며 정당한것이라고 묘사하였지만 《합방》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강도행위였다. 강도들에게는 그들나름의 생활철학이 있다. 남의것을 강도적으로 빼앗아 거머쥐고는 그것을 찾자고 하는 주인을 도리여 강도라고 우겨대는것이다.
적반하장에 이골이 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한 《비적단》, 《마적단》, 《공비단》 하는 따위의 표현들은 모두가 그와 같은 강도의 론리를 타고 고안된 악명들이다.
강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모든것이 죄다 거꾸로 뒤집혀지는 법이다.
불청객 미나미는 제법 주인행세를 하면서 대낮에 서울장안으로 버젓이 들어서고 반면에 주인인 우리들은 길도 없는 밀림을 헤치며 제 나라 땅으로 숨어들어가야 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나는 되골령을 넘어서자 본래의 행군계획을 변경시켜 압록강연안을 에돌아 백두산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하였다. 국경지대의 인민들도 만나보고 국내동포들에게 우리의 총성도 들려주자는것이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덕수골이였다. 우리 부대에는 리제우, 형권삼촌이 지도한 장백지방의 지하조직에서 다년간 청년들과의 사업을 하다가 입대한 대덕수출신의 신입대원이 한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현민이였다. 그가 혁명군에 입대한것은 우리가 무송지방에서 활동하고있을 때였다. 그는 약담배를 가지고 다니면서 소장사를 하느라고 무송으로 들락날락하다가 우리 공작원들의 알선으로 나도 만나고 유격대에도 입대하였다.
우리는 강현민과 김주현이네 선발대를 통하여 덕수골일대의 주민동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였다.
덕수골은 장백의 모든 주민지구가운데서도 농촌혁명화가 가장 잘된 고장이였다. 그곳에는 3.1인민봉기이후 독립운동자들이 개척해놓은 반일애국투쟁의 전통과 그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단련되여온 믿음직한 군중토대가 있었다.
덕수골은 강진건이 지도한 독립군의 본거지였다. 독립군은 덕수골에 4년제소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과 농민들에 대한 계몽활동도 하였다.
팔도구시절에 우리 아버지도 여러번 이 고장을 다녀갔다.
독립군단체들의   해체로   독립군운동이  쇠퇴기에   들어서고있을  때   리제우의   무장소조가  《ㅌ.ㄷ》의 강령을 들고 덕수골에 진출하여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였다.
리제우가 체포된 후에는 형권삼촌이 최효일, 박차석과 함께 덕수골을 거점으로 삼고 이 일대에서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장백지방에는 백산청년동맹산하조직이 결성되였다.
동맹은 정치군사훈련소를 설치하고 수많은 정치공작원들과 유격대원후비들을 육성하였다.
조선혁명군 무장소조가 국내로 떠나가고 동맹간부들중 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다음에도 동맹원들은 지하에서 꾸준히 투쟁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계몽되고 교양되고 혁명화된 대중적지반에 기대를 걸고있었다.
부대가 덕수골지경에 들어서자 김주현은 선발대로 나와 활동할 때 믿을만 한 인물로 점찍어두었던 렴인환로인의 집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어느 구석을 둘러보나 가난이 푹 배여있는 촌의원네 집이였다. 침술이 능하기로 소문나서 덕수골일판에서는 물론이고 장백이나 림강, 지어는 압록강건너에서도 발구나 달구지로 모셔가기도 한다는 의원이라지만 약값의 본전도 걷어들이지 못해 이 집의 안주인은 끼니때마다 빈바가지를 치마폭에 감춰들고 쌀동냥을 다니는 형편이라 하였다. 그전날 의원간판을 내걸었던 팔도구와 무송시절의 우리 집을 방불케 하는 살림이였다.
렴로인은 자청하여 내 손맥을 짚어보고 지나치게 과로하고 식음을 소홀히 한탓에 신기가 허해졌다면서 산삼 한뿌리를 내놓았다. 만강의 허락여로인도 우리와 헤여질 때 몸보신에 쓰라고 하면서 장철구와 백학림에게 산삼 몇뿌리씩을 쥐여주었다고 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무송에서 김장군이 인솔한 항일련합부대에 얻어맞고 수백명이나 북망산귀신이 되였다는데 그게 정말이웨까?》
렴로인이 나에게 한 질문이였다. 무송현성전투소식이 벌써 이 고장에도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였다.
내가 정말이라고 하자 로인은 무릎을 철썩 쳤다.
《됐수다. 이제는 조선이 살아났수다!》
우리에게 하루밤의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한끼의 감자보리밥을 내놓은것때문에 후날 렴인환로인은 이도강경찰서에 끌려가 학살되였다. 로인이 당한 불행을 상기하느라면 지금도 살이 떨린다. 언제인가 소부대를 데리고 그 지방을 지나게 된 기회에 나는 일부러 렴로인의 묘소를 찾아서 제주를 붓고 절을 드리였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이슬을 걷어차며 대덕수로 향하였다. 발밑으로 마을이 굽어보이는 등성이에서 삶은 감자 몇알씩으로 대강 조반을 굼때였다. 나는 리동학중대장에게 기발대를 준비하였다가 대덕수로 내려갈 때 대렬선두에서 기발을 높이 들고 나팔소리를 내라고 지시하였다. 기가 눌려 사는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싶었다.
우리를 맞이한 대덕수사람들의 기쁨과 놀라움은 한량없었다. 신식보총에 기관총까지 그쯘하게 갖춘 수백명의 조선군대가 대낮에 그것도 기발을 들고 천하가 들썩하게 나팔소리까지 내며 나타나기는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만강에서와 같은 연극공연을 펼쳐보일 작정으로 가설무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점심이나 지내고 하려던 공연계획은 실현할수 없게 되였다. 점심상을 받아놓고 수저를 들려는데 불시에 적들이 밀려들었다. 그바람에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다 익은 곡식이 피해를 당할가봐 마음씌여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적들은 보리밭 맞은편에서 고랑을 따라 접근해왔다. 나는 적들이 보리밭을 거의다 벗어져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사격신호를 올리였다.
우리 대원들이 그 싸움을 솜씨있게 치르었다. 적들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도강쪽으로 퇴각하였다. 그것이 장백에 나와서 진행한 첫 싸움이였다. 대덕수에서 울린 첫 총성으로써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에 나왔다는것을 조국인민들에게도 알려주고 적들에게도 알려주었다.
마을은 명절처럼 흥성거리였다. 이웃마을사람들까지 대덕수에 모여들어 우리의 승전을 축하해주었다. 인민들은 감자떡을 치고 농마국수를 눌러 우리를 환영하였으며 우리 대원들은 춤과 노래로 그에 답례하였다. 나는 선동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팔자수염의 한 로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 백두산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다 모여라.〉하고 소리만 쳐주시오. 그러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거우다. 나도 비록 늙고 허리굽은 몸이지만 아무 시중이건 다 들수 있수다.》
후에 알고보니 그 고무적인 말을 해준 로인이 소덕수의 《꼽새령감》이였다.
《꼽새령감》에 대해서는 《대통령감》도 잘 알고있었다. 《대통령감》이 군비단에서 함경남도 통신사무국장으로 사업할 때 《꼽새령감》은 거기서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는것이다. 《대통령감》은 10여년만에 감격적인 해후를 하게 된 옛날의 전우를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꼽새령감》의 본명은 김득현이다. 김세현은 독립군활동을 할 때부터 쓰기 시작한 가명이다. 그는 선천적인 곱사등이가 아니였다. 그저 곱사등이처럼 등이 몹시 굽었을뿐이다. 본래는 그도 허리가 꼿꼿하고 가슴이 쩍 벌어진 균형잡힌 몸매의 청년이였다. 그가 꼽새처럼 허리가 휘여든데는 경의를 표할만 한 사연이 있었다. 그는 함경도태생이였는데 《합방》직후의 음산한 시절에 살길을 찾아서 덕수골로 이주해왔다. 이 고장은 떠나온 고향과 조국에 대한 향수로 살아가는 류랑민들의 개척촌이였다. 덕수골에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고향에 돌아갈 길을 열어준다는 군비단이라는것이 생겨나자 김득현은 주저없이 거기에 입단하였다. 그는 단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3살짜리 귀한 딸을 남의 민며느리로 보내는것도 서슴지 않았으며 무기를 구하려고 내전을 치르고있는 먼 로씨야땅에 가서 그곳 싸움터에까지 뛰여들었다.
그러나 10여년에 걸쳐 그처럼 헌신적으로 활약한것때문에 후에는 여느 단우들보다 더 긴 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수인들은 하루 14시간, 15시간씩 수동직기로 천을 짜내는 일을 강요당하였다. 조금만 허리를 펴도 채찍과 몽둥이가 그들의 등어리를 사정없이 들부시였다. 7~8년간이나 지속된 그 지긋지긋한 고역은 마침내 김득현의 허리를 영영 휘여놓고야말았다.
《꼽새령감》은 페인처럼 보였으나 그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는 애국열과 투쟁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가 리제우의 무장소조에 선참으로 흡수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그는 김주현을 만난 때로부터 우리가 백두산에 나오기를 일일천추로 고대해왔다고 고백하였다. 김주현은 장백에 선발대로 나왔을 때 이미 그와의 친교를 맺어두었다.
간단한 연예공연과 연설을 마친 다음 나는 부대에 철수명령을 내리였다. 마을사람들은 정을 붙이자마자 이렇게 훌쩍 떠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하루밤만이라도 묵어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부득이 떠나야 할 까닭을 설명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적들이 증원대를 끌고 어느 시각에 달려들지도 모르니 우리가 자리를 떠야 마을이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떠날 때 길잡이는 다름아닌 《꼽새령감》이 하였다.
나는 김득현로인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등사되여있는 소책자를 주었다. 우리가 압록강연안에 나와서 이 소책자를 준 사람으로는 그가 첫번째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덕수지구에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생겨났다.
《꼽새령감》은 16도구의 한 분회 성원이였다. 덕수지구의 여러 말단조직들가운데서 그 분회조직이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였다. 오늘날의 총련에서처럼 모범분회라는 칭호를 제정할수 있었다면 그 분회가 제일 선참으로 모범분회가 되였을것이다. 김득현로인은 여러 마리의 개를 길렀다. 후각이 류달리 예민한 그 영악한 맹견들때문에 밀정이나 경찰들은 그 집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였다.
그 집 개들이 사람을 신통히 가려냈다. 우리 사람들이면 초면인물이 접근해도 짖지 않았다. 김주현, 김확실, 김정숙을 비롯하여 개별공작을 나가는 우리의 소부대성원들이나 련락원들이 덕수지구에 가면 《꼽새령감》의 덕을 많이 입군 하였다.
김정숙이 한번은 단독임무를 받고 장백현 중강구쪽에 다녀온적이 있었다. 우리가 백두산에 나온 그해 초겨울이였다. 그 당시 개별임무를 받고 나다니게 되는 동무들은 도중량식으로 생쌀이 아니라 주먹밥이나 삶은 감자 같은 익은 음식을 가지고 다녔다. 간도의 항일근거지들에서도 개별임무를 수행하는 통신원들은 그렇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짝을 지어 다닐 때에는 망을 세워놓고 밥을 지어 먹어도 되지만 혼자서는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을수 없었다. 《산사람》이라는 표적이 나기때문이다. 정숙이도 삶은 감자 몇알을 싸들고 요방자를 떠났다가 로상에서 언 시래기를 씹고있는 로파와 아이를 만났다. 정숙은 그 정상이 너무도 가긍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는 자기의 도중식사를 그 류랑 고아와 로파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나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놓으며 산길을 톺았다. 후날 그는 자기가 어떻게 《꼽새령감》네 집에까지 가낼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꼽새령감》내외가 자기의 량옆에 미음그릇과 숟가락을 든채 울며 앉아있더라는것이다.
그 집 내외는 미음도 써주고 녹두지짐도 부쳐주고 종자닭을 잡아 곰도 해주면서 정숙이를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런 간호가 아니였더라면 자기가 살아서 백두산밀영으로 돌아올수 없었을것이라고 정숙은 해방후에도 여러번 외웠다.
《꼽새령감》이 우리 밀영에도 여러번 왔었다. 온전치도 못한 몸으로 후원물자를 지고 들어왔다가는 기회를 엿보아 다른 사람 모르게 나를 찾군 하였다.
우리가 반절구전투를 할 때에도 그는 길잡이를 서주었다. 1939년에 소덕수의 수림속에서 5.1절경축대회를 벌렸을 때에는 농민대표로 참석하여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1942년초에 나는 《꼽새령감》이 병사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백두산시절에도 그후에도 《꼽새령감》에 대하여 종종 추억하군 하였다.
1947년 11월 나는 갓 설립된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에게 입힐 교복이 마련되였다는 보고를 받고 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고싶어서 원아들을 몇명 보내달라고 한적이 있다. 그때 우리 집에 온 아이들중에는 《꼽새령감》의 아들 김병순도 있었다.
그후 학원으로 찾아간 김정숙은 병순이를 따로 만나 유격대시절부터 애용해오던 만년필을 선물로 주면서 공부를 잘하라고 당부하였다.
1949년 8월 김병순은 새 군관복에 소대장견장까지 달고 나와 김정숙앞에 나타났다. 경비소대장으로 배치되여온것이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였다.
그날부터 그는 우리곁을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정숙동무를 잃은 슬픔도 함께 겪었고 충청북도 수안보의 전선사령부에도 같이 갔으며 자강도 고산진의 최고사령부에도 같이 가서 지냈다. 그후에도 오래동안 우리곁에 가까이 있었다.
나는 항상 내 신변가까이에서 떠돌고있는 《꼽새령감》의 마음을 느낄적마다 대덕수마을에서 그가 한 말과 소덕수등판의 달밤을 추억하군 하였다.
소덕수등판에서 숙영한 이튿날 우리는 부대를 마등창수림속에 이동시키고 대원들을 휴식시켰다. 나도 풀밭에 누워 책을 보다가 굳잠이 들었는데 총소리가 났다. 15도구방향과 이도강방향에서 밀려온 적들이 남북량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무성한 숲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렵게 하였다. 만일 우리가 감쪽같이 빠져나가면 적들의 협공을 저들끼리의 골육상쟁으로 역전시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는 마등창수림에서 슬쩍 빠져나와 15도구골등판으로 올라갔다. 그 등판에서 적들끼리 싸우는 꼴을 구경하였다. 그것이 세칭 소덕수전투라고 하는 마등창망원전투이다.
그날 적들끼리의 맹렬한 싸움이 서너시간쯤 실히 걸렸던것 같다. 구경군들이 지루할 정도였다. 적들은 이렇게 장시간 싸우다가 이도강쪽패가 정 못견디겠던지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15도구쪽패도 제편끼리 싸운줄 알았는지 사격을 중지하였다.
수백명의 유격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온데간데 없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문제에 대한 해명을 적들은 우리의 《둔갑술》에서 찾은것 같다. 우리가 《둔갑술》을 써서 《승천입지》하고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국경지대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것이 이 소덕수전투가 있은 때부터였던것 같다.
그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신창동의 집집마다에서 문짝이라는 문짝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그통에 신창동사람들은 한동안 문대신 가마니짝을 달고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대덕수와 소덕수에서 인민혁명군이 울린 총소리는 장백과 그 대안의 조국인민들에게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투가 끝난 다음 우리가 감자밭이 결딴난데 대하여 걱정하자 신창동의 한 농민은 이렇게 말하였다.
《감자밭은 결딴났지만 악귀같은 왜놈군대들이 저렇게 죽탕이 되여 나딩구는걸 보니 풍년든 감자밭을 보는것보다 더 기쁘오다.》
덕수골일대에서는 그후 여러명의 청년들이 입대를 탄원하였다. 그들의 입대는 장백지방에서 혁명군대오를 급격히 확대시킨 대대적인 참군운동의 서막으로 되였다.
인민혁명군의 장백진출과 군사적위세앞에서 적들은 대경실색하였다. 장백지방 경찰기관들에서는 경찰들이 집단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공직을 회피하는 리직은퇴바람이 불었다. 적들의 통치체계에서는 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이도강에서는 집단부락출입도 앞문으로가 아니라 뒤문으로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장백땅에 와서 군사작전만 한것이 아니였다. 대중을 교양하고 결속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도 진행하였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에 의하여 덕수골, 지양개골 일대에서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도처에 꾸려졌다.
국내에서도 조직들이 꾸려지기 시작하였다.
백두산주변의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 그 조직들은 새로 창설되는 근거지의 믿음직한 정치적지반으로 되였다.
우리는 소덕수전투가 있은 다음에도 압록강연안의 여러 마을들을 돌면서 장백현 15도구 동강, 13도구 룡천리, 20도구 이종점 등 곳곳에서 련속 전투를 벌렸다. 압록강연안일대는 벌둥지를 쑤셔놓은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우리가 우회로정을 택하면서 세웠던 목적은 원만하게 달성된셈이였다. 이제는 백두산으로 들어가 보금자리를 틀 때가 되였다. 나는 김주현과 리동학을 앞세우고 백두산밀영후보지로 향하였다. 부대의 기본지휘성원들과 경위대 그리고 일부 전투중대들이 우리와 동행하였다. 나머지인원들에게는 장백쪽에서 좀더 소란을 피우라는 과업을 주어 떨구어놓았다.
김주현, 리동학, 김운신 등에 의하여 탐색된 소백수골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잡아놓은 국내의 첫 밀영후보지였다. 소백수골에서 서북방향으로 40리가량 되는 곳에는 백두산이 솟아있고 20리쯤 되는 지점에는 선오산, 동북방향으로 15리 정도 떨어진 수림속에는 간백산이 각각 솟아있었다. 소백수골뒤에 길게 가로놓여있는 산은 사자봉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소백수골로 나온것은 집을 떠났던 주인이 오래간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온것과 같은 경사였다. 항일혁명이라는 큰 력사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활동중심을 동만에서부터 백두산으로 옮겼다고 할수 있다.
집을 떠나서 객지에 얼마간 가있던 사람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은 이웃들에게도 경사로 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시에도 있는것처럼 《날새도 고적에 애태우다 날아 날아 떠나고야》만다는 백두의 중중심처 소백수골에는 우리를 축하해줄만 한 이웃조차 없었다. 우리를 맞이한것은 설레이는 수림과 골개물뿐이였다. 조국의 인민들은 아직 우리가 소백수골에 나왔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대오를 짓고 100리밖에만 가면 두팔을 벌리고 우리를 뜨겁게 안아줄 조국의 인민들을 얼마든지 만나볼수 있었다. 그런데 그 100리밖에는 총검을 들고 우리를 겨누는 섬나라불청객들이 있었다. 그 불청객들만 아니라면 우리는 백두산의 눈사태처럼 쓸어내려가 사랑하는 인민들과 격정에 넘치는 상봉을 할수 있을것이다.
오로지 싸움만이 우리에게 조국동포들과의 상봉을 마련해줄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 싸움을 위하여 백두산지구에 나왔고 그 싸움을 위하여 소백수골에 보금자리를 잡은것이였다.
그때 나와 함께 소백수골에 나왔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금자리로 삼았던 그 깊고깊은 골짜기가 후날 온 세상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사적지로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락엽이 끊임없이 떠내려오는 소백수물줄기를 따라 골안으로 올라갔다.
오늘날 소백수골을 찾아드는 답사자들은 이 고장이 반세기전만 해도 얼마나 태고연한 적막강산이였는지를 아마 상상도 못할것이다. 관광뻐스와 답사자들이 줄지어 다니는 훌륭한 포장도로, 고급호텔에 비겨도 그닥 손색없을 답사숙영소들과 숙영소마을, 사철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들과 노래소리, 이 모든것으로 지금은 지난날의 정적과 정갈이 새롭게 가꾸어졌지만 우리가 첫발을 들여놓던 그 당시는 산짐승들이 지나다닌 자국조차 쉽사리 찾아볼수 없었던 원시림지대였다. 개벽이래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있은 당시의 소백수골은 그 뛰여난 경개와 천험의 요새다운 지세부터가 우리 마음에 들었다.
소왕청 마촌시기에 우리 유격대지휘부가 자리잡고있은 리수구골의 자리가 대단히 좋았다. 골도 깊고 산세도 험하여 적들이 수월히 범접할수가 없었다. 어쩌다 가까스로 기여든다 해도 쳐물리치기 좋은 지세였다. 사자봉아래쪽의 합수목에서 백두산밀영자리로 들어가는 소백수골의 지형과 산세는 신통히도 소왕청의 리수구골과 비슷하였다.
리수구골과 소백수골이 약간 차이나는 점은 리수구골보다 소백수협곡이 좀더 웅심깊고 아름답다는것이다. 골안깊이 들어갈수록 그 차이는 현저해진다. 천산만악을 거느린 백두령봉의 갈피속에 자리잡은 골짜기인것만큼 역시 골도 깊고 산도 덩지가 컸다.
우리는  어둡기 전에  장수봉맞은편  산언저리와  소백수가에  숙영천막을  치고   그날  밤을 지냈다.
나는 하루밤에 서너시간이상 잠자는 경우가 드물다. 산에서 싸울 때도 대체로 새벽 2시경이면 어김없이 깨여나 불을 켜놓고 책을 보군 하였는데 그날 밤에는 너무 곤해서 새벽독서를 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사이에 서리가 내렸다.
백두산지구는 여느데보다 겨울도 길고 눈도 많이 내린다.
이 지구에 한번 내린 눈은 쉽게 녹지 않는다. 6월말이나 7월초까지도 묵은 눈을 볼수 있는가 하면 9월 하순이나 10월 초순에는 산정에 내려앉는 햇눈을 볼수 있다. 눈이 쌓이고 덧쌓여서 사람의 키를 넘는 때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눈속에 굴길을 뚫어야만 다닐수 있다. 밀영밖으로 나다닐 때는 설피를 신어야만 하였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깊은 눈구뎅이속에 빠져들어 불상사를 당할수 있었다.
그러나 강풍과 폭설의 위협을 무시로 받고있는 이 엄혹한 고산지대에도 사계절의 구별은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계절이 베풀어주는 혜택을 입을수가 있었다.
나는 로흑산전투를 할 때 청취를 처음 먹어보았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쌈을 싸먹으면 부루보다 오히려 낫다. 병풍은 장백현 19도구 리훈의 집에 가서 처음 먹어보았다. 그것도 역시 별맛이였다.
그런 산나물들이 백두산지구에 많았다. 청취는 대홍단벌에 많았고 병풍은 삼지연부근에 많았고 무수해는 베개봉에 많았다. 작식대원들이 따들인 그 산나물들이 우리 백두산《주민》들의 여름식탁을 풍성하게 해주군 하였다.
백두산밀영에서 정착생활을 할 때 작식대원들은 터밭을 마련하고 남새농사까지 지었다. 새초밭 한옆에 터밭이 있었다. 여러가지 남새농사를 지었으나 배추, 무우는 안되였다. 그러나 부루와 쑥갓만은 잘 자랐다.
소백수의 산천어도 이따금씩 식탁에 올랐다. 그때는 마리수가 적었지만 지금은 양어가 잘되여 마리수도 많아졌다.
백두산밀영지에 처음으로 들어온 다음날 나는 지휘성원들과 함께 밀영후보지를 돌아보았다. 선발대동무들이 내정해준 병영위치들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간부회의를 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남호두를 출발하여 백두산에 이르기까지의 원정에 대하여 총화를 지었다. 백두산을 타고앉아 해나가야 할 사업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게 토의하고 분공도 조직하였다.
그 모임에서 토의되고 모임뒤에 곧 실천행동으로 옮겨진 문제를 한마디로 집약하면 우리앞에 긴절한 과업으로 나서고있는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적극 다그치는것이였다. 그것은 밀영건설과 조직건설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포괄하고있었다. 즉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한다는것은 백두산지구에 밀영들을 건설한다는것과 백두산기슭의 주민지대들에 지하혁명조직들을 건설한다는것이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동만에서 창설하였던 유격구와 후반기에 백두산에 나와서 새로 창설한 백두산근거지사이에는 내용상에 있어서나 형태상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전반기의 동만유격구는 고정된 유격구를 유격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근거지로서 눈에 보이는 공개적인 혁명근거지였다. 그러나 우리가 후반기에 새로 창설한 백두산근거지는 은페된 밀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에 의거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한 보이지 않는 혁명근거지였다.
전반기에는 근거지안의 인민들이 인민혁명정부의 시책속에 살았고 후반기에는 지하조직망에 망라된 인민들이 표면상으로는 적의 통치를 받았으나 안속으로는 우리의 지령과 로선에 따라 움직이였다.
전반기에는 유격구사수를 위한 방어에 큰 힘을 넣어야 하였지만 후반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유격활동을 광활한 지역에서 벌려나갈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였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근거지형태를 바꿈으로써 주동적인 공격자의 위치에 서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근거지를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우리의 활동령역은 그만큼 더 넓어지게 되여있었다.
우리는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장백의 넓은 지역과 장차로는 백무고원, 개마고원, 랑림산줄기로 뻗어나가면서 근거지를 국내종심깊이 확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북부조선으로부터 중부조선을 거쳐 남부조선에 이르는 전국적판도에로 번져가게 하는 동시에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확대발전시키고 전민항쟁준비도 강력히 추진시킬 작정이였다.
밀영망창설과 지하조직망건설이 이처럼 우리들의 존망과 생사운명, 나아가서는 항일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초미의 문제로 되여있은것만큼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먼저 밀영건설을 1차적과제로 내세우고 이 과업을 각 부대에 맡기였다. 먹고 입는 문제의 해결과제는 김주현에게 맡기였다. 밀영설치와 운영을 위한 이 두가지 문제는 통속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식의주문제이기도 하였다.
지하조직망건설을 방조해줄 인재를 적극 탐색하며 우리 인민의 사기를 북돋아주어 그들이 광복성업에 발벗고나서도록 필요한 전투활동을 진행하는것도 역시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 두가지 과업은 리동학의 중대에 맡겼다.
지휘관들은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위한 분공수행에 지체없이 착수하였다. 김주현과 리동학이 중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그밖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개별임무를 주어 공작지로 떠나보낸 다음 나도 경위대와 7련대의 일부 성원들을 데리고 곰의골로 향하였다. 황공동부락에서 갈라진 부대의 기본력량과 만나게 되여있는 곳이 곰의골이였다.
소백수골에서 곰의골로 갈 때의 걸음이 자못 인상적이였다. 나는 그때 선오산과 삼단폭포를 보았는데 참으로 신비경이였다. 우리 일행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여 숲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대탁온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쪽으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알수 없는 수림의 바다에서 향방을 잡지 못하고 2시간나마 왔다갔다하다가 몇개의 정찰조를 여러 방향으로 내보냈더니 그중의 한 정찰조가 로인 한분을 모셔왔다. 백두산턱밑에서 홀로 산다는 늙은이라는데 만강쪽에 소금과 좁쌀을 얻으러 내려갔다 오던 길에 우리 정찰조를 만났다는것이다. 우리는 로인의 안내를 받아서 그가 사는 대탁의 초막으로 갔다. 그 초막옆에는 아주 좋은 온천이 있었다. 물이 어찌나 뜨거운지 가재를 넣으면 빨갛게 익었다. 우리는 그 물에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가재도 익혀 먹었다. 언제인가 텔레비죤화면에서 이슬란드사람들이 추운 한겨울에 야외온천욕을 하는것을 보니 대탁에서 온천욕을 하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때 대탁의 로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되여 백두산턱밑에까지 들어와 살게 됐는가고 물었더니 로인의 대답이 원래는 벌방에서 살았는데 시운이 기울어지는것을 보고 조종의 산으로 올라왔다고 하였다.
《망국노의 수치를 안고 죽기는 매일반인데 죽어도 백두산밑에 와서 살다가 죽고싶은 생각이 나겠지요. 나에게 천자문을 배워주던 서당훈장님은 늘 조선사람은 백두산을 안고 살다가 백두산을 베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수다. 정말이지 그 말씀은 비석에라도 새겨두고싶은 금언이였습지요.》
미간을 쪼프리고 백두산쪽을 응시하는 로인의 시선을 따라 끝없이 가느라면 그가 걸어온 구질구질한 한생의 진창길이 펼쳐질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심경이 자못 엄숙해졌다. 백두산밑에서 살다가 백두산을 베고 죽겠다는 로인의 말은 나를 감동시키였다.
《그래 백두산두메맛이 어떻습니까?》
《별맛입니다. 감자농사와 노루사냥으로 고달프게 살아가고있기는 하지만 왜놈의 꼴을 보지 않으니 살이 지는것 같수다.》
그 로인과의 담화는 나로 하여금 백두산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정신생활에서 굳건한 기둥으로 되고있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하였으며 백두산을 혁명의 책원지로 삼은것이 천만번 옳았다는것을 새삼스레 절감하게 하였다. 이웃도 없이 홀몸으로 백두산에서 인생말년을 강인하게 보내는 그는 참으로 애국적인 로인이였다. 유감스러운것은 그 늙은이의 성씨를 묻지 못하고 헤여진것이다.
라자구등판의 마로인처럼 그에게도 책이 많았다. 우리가 온천욕을 마치고 대탁을 떠나 곰의골로 향할 때 로인은 나에게 여러권의 소설책을 선물하였다. 후날 우리는 바로 대탁온천지에 전장에서 부상당한 대원들과 허약자들을 위한 료양소를 꾸리였다.
우리 일행이 곰의골에 도착한 후 어느날 교하지방에서 활동하던 2련대성원들이 곰의골로 찾아왔다. 권영벽, 오중흡, 강위룡 등이 바로 그때 교하에서 돌아온 사람들속에 끼여나와 함께 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였다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홑옷을 입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백두산으로 찾아오다가 어느 목재소를 치고 소를 얻었는데 우리를 위해 두마리는 산채로 끌고왔다. 피골이 상접한 그들의 모습과 헐어빠진 여름군복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들도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들에게 새옷을 갈아입혔다. 겉옷뿐아니라 내의도 갈아입히고 행전과 지하족도 갈아주었다. 세면도구도 일식으로 공급해주고 담배와 성냥까지 내주게 하였다.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교하쪽에서 돌아온 강위룡은 박영순과 함께 곰의골, 횡산, 홍두산지구의 여러곳에 밀영들을 꾸리였다. 박영순과 강위룡은 도끼 하나만으로도 1개 련대가 넉근히 숙영할수 있는 커다란 귀틀집을 2~3일사이에 척척 지어내는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있었다. 장백지구의 밀영건설에서는 아마 그 두사람의 수고가 제일 많았을것이다. 조국안이네 부대사람들이 곰의골에 왔을 때 우리 부대 사람들이 단 하루사이에 자기들의 숙소를 지어놓는 솜씨를 보고 경탄하였던것도 기실은 그들의 덕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내가 곰의골에서 얼마동안 지내다가 소백수골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여러 지점의 밀영지들에 새 귀틀집들이 일어섰다. 사령부와 부대병실들, 출판소와 재봉소건물들, 위병소와 차단소들이 밀림속 곳곳에 생겨났다.
밀영의 귀틀집출입문들에 노루발쪽손잡이가 달리게 된것이 그때부터였다.
그 하찮은 노루발쪽손잡이가 나에게는 력사적시기를 구획짓는 리정표처럼 뇌리에 새겨져있다. 우리의 백두산《주택》들에 노루발쪽이 문손잡이로 달리게 된 때로부터, 다시말하여 소백수골에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꾸려지게 된 때로부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였다.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동시에 심장부였으며 우리의 중핵적인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였다.
바로 그 백두산밀영으로부터 미구에 북부, 중부조선의 곳곳에 부채살같이 뻗어나가면서 수많은 비밀근거지들이 생겨나게 되였다.
그  밀영들에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혁명의  불길을  지피기  위하여  권영벽, 김주현, 김평, 김정숙, 박록금, 마동희, 지태환 등의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이 전국각지로 떠나갔으며 또한 백두산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리제순, 박달, 박인진 등의 수많은 인민의 대표들이 새로운 혁명의 불씨를 안고 다시금 인민들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의 부대들이 원쑤들을 찾아 출전의 길을 떠났다. 혁명의 운명과 직결된 크고작은 모든 일들이 거의 전부 백두산밀영에서 구상되고 설계되고 행동에 옮겨졌다.
백두산밀영망에 속한 위성밀영들은 조선쪽에도 있었고 중국쪽에도 있었다.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은 조선쪽에 꾸려놓은 밀영들이였으며 곰의골밀영, 지양개밀영, 이도강밀영, 횡산밀영, 리명수밀영, 부후물밀영, 청봉밀영들과 무송지구의 여러 밀영들은 서간도쪽에 꾸려놓은 밀영들이였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그 모든 밀영들을 다 리용하였다.
백두산지구의 밀영들은 각이한 사명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순수한 비밀병영의 역할만 한것이 아니라 재봉소나 무기수리소, 병원 같은 후방밀영의 역할을 한것도 있었으며 공작원들의 중간련락소나 숙영소역할을 한것도 있었다.
백두산밀영망의 심장부는 소백수골의 밀영이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 우리는 소백수골의 밀영을 《백두산 1호밀영》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백두산밀영》이라고도 부르고 《백두밀영》이라고도 부르고있다.
최대한의 안전과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거기에는 사령부직속 부서성원들과 경위대를 포함한 일부 골간부대만 있게 하고 출입도 엄격히 제한단속하였다. 그 당시 우리와 함께 상시적으로 지내지 않는 부대나 개별적사람들이 사령부에 찾아왔을 때에도 소백수골의 밀영에서 만나지 않고 2호밀영(사자봉밀영)에 나가 만나주군 하였다. 2호밀영에서는 사령부를 찾아온 부대나 개별적인 방문객들을 맞아도 주고 쉬우기도 하고 떠나보내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에게 강습이나 훈련도 주었다. 2호밀영은 사령부를 찾아온 사람들의 접수소인 동시에 대기소이기도 하였고 면담소인 동시에 숙소이기도 했으며 또한 강습소인 동시에 훈련소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사령부로 찾아오는 통신원들도 흔적을 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리명수쪽에서 올라오다가 소백수골어귀에서부터는 소백수물줄기를 따라다니게 하였다. 우리는 밀영의 처소들을 누구에게나 다 알리지 않았다. 누구나 다 아는것은 비밀이 아니고 밀영도 아니다.
백두산밀영과 그 주변밀영들이 있는 곳을 속속들이 알고있은것은 김주현과 김해산, 김운신, 마동희와 같이 련락임무를 도맡다싶이했던 몇몇 사람들과 소수의 지휘성원들뿐이였다.
백두산밀영과 그밖의 다른 밀영들 그리고 거기서 지냈던 우리 《주민》들이 항일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자기들의 존재를 고이 숨겨 보존할수 있은것은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백두산은 나의 청춘시절의 《집》이였다. 어린시절의 고향집식솔에 비할수 없는 많은 식솔들이 나와 함께 거기서 지내며 백두산의 눈비를 맞았고 오늘의 조국을 꿈꾸었다.
백두산에서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그전날의 백두산개척자들가운데서 지금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후세들에게 백두의 갈피갈피에 차넘치는 우리 당의 혁명력사와 선렬들의 투쟁업적을 소개하고 전해주어야 할 선대로서의 사명을 제때에 옳바로 수행할수 없게 하였다.
나도 백두산밀영을 제때에 찾아주지 못하였다.
건당, 건국, 건군사업과 전쟁, 복구건설 등 하도 많은 일감을 짊어지고있다보니 젊어서는 백두산시절의 본거지로 와볼 짬을 내지 못하였다.
박영순이네가 살아있을 때에 백두산밀영의 옛 자리들을 후대들에게 찾아주라고 몇번이나 일렀지만 그전날의 그 날파람있던 목수도 자기들이 직접 지은 곰의골이나 지양개, 횡산의 밀영자리들과 청봉, 베개봉, 무포 같은 숙영지자리까지는 찾아내면서도 백두산밀영자리는 끝내 못 찾아내였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 밀영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였다.
결국 백두산밀영자리는 늦게나마 내가 찾게 되였다. 어쩌다 짬이 생긴김에 백두산지구 밀영들을 꾸려놓은것을 보고싶어 그곳에 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소백수다리가 있는 한 고장의 지세가 하도 눈에 익어보여 답사성원들을 소백수골로 파견하였다. 100여길쯤 되는 벼랑바위봉우리가 있는 골안에 찾아 들어가면 그리 넓지 않은 새초밭이 있을테니 한번 찾아보라고 일러보냈다. 그러면서 그 골안은 산과 산이 서로 붙어있기때문에 밖에서 보아서는 잘 알리지 않는다는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 지구가 당시까지만 하여도 어찌나 무시무시하고 험했던지 압록강연안 참관도로를 내기 위하여 언제인가 현지에 책임서기와 군사무관을 답사보낸적이 있는데 그들이 그만 원시림속에서 길을 잃고 숱한 애를 먹은 일도 있었다. 호위중대를 보내여 그들을 겨우 찾아 데려왔다. 실로 미혼진에 못지 않는 혼미의 지대였다. 소백수골로 들어간 탐사, 답사성원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먼저 구호나무들을 발견한데 이어 집자리와 숙영지자리들도 찾아내였다. 이리하여 우리 혁명의 후세들앞에 백두산밀영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였다.
오늘날 백두산은 우리 혁명의 2세, 3세, 4세들에게 1세들이 지녔던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배우게 하는 학교로 되고있다. 광활한 백두대지에는 대로천혁명박물관이 형성되였다.
력사의  흐름과  더불어  백두산의 상징적의미는  풍부해졌다.  실제에  있어서  백두산은  이미 30년대 후반기에 자기의 고유한 상징적의미외의 새 의미를 띠기 시작하였다.
사화산이던 백두산에서 분출한 《광복혁명》의 용암은 2천만동포의 주목을 끌었다. 항일혁명의 불길이 미쳐간 곳곳을 돌아본 작가 송영은 자기의 답사기행문집에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는 표제를 붙였다. 그 표제가 말하듯이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때로부터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이는 광복의 활화산, 혁명의 성산으로 되였다.

4. 녀성중대

한때 조선사람들은 독립군의 유일한 녀장부 리관린을 놓고 《만록총중 일점홍》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빨찌산을 핵심으로 하는 항일의 만록총중에는 우리 민족이 낳은 수백수천점의 붉은꽃들이 아름답게 피여있었다.
애국의 일념으로 불타는 이 나라의 어머니들과 딸들은 남성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부담과 정신적고통을 겪으면서도 혁명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일제를 조국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도 청춘도 가정도 다 바쳤다.
그 자랑스러운 녀성투사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나는 1936년 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을 편성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였던 녀성중대에 대하여 회고하게 된다.
남호두회의이후 백두산으로 나오는 길에서 새로운 주력사단과 함께 녀성중대를 따로 조직한것은 유격대오의 급속한 확대발전과 전반적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앙양을 시사해주는 경이적인 사변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녀성중대의 탄생, 그것은 봉건적질곡에 의해 수천년동안 뒤고방에 갇혀있던 우리 조선의 녀성들이 혁명투쟁의 제1선에 당당히 나섰다는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
지금은 우리가 녀성들의 사회적지위를 두고 말할 때마다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표현을 쓰고있지만 항일혁명시기에만 해도 녀성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 더우기 녀자가 총을 잡고 남성들과 같이 장기간 무장투쟁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여 나도 초기에는 녀성들의 참군을 불합리한것으로 보았다. 녀성들은 남성들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는 생각, 그들이 그 연약한 몸으로 유격투쟁앞에 나서는 모든 중하를 감당해낼수 없을것이라는 선입견이 내 머리를 지배하였던것이다.
물론 우리는 몇몇 녀성들이 지난날 외래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세인을 경탄케 하는 공적도 세우고 경이의 대상이 될수 있는 일화도 남기였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적장 소서비의 목을 베게 한 평양의 명기 계월향이나 진주의 론개와 같은 애국녀성들의 무훈담은 세상에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다.
《임진록》을 읽어본 사람들은 행주산성싸움이 얼마나 격렬했고 그 싸움에서 녀성들이 얼마만큼 큰 몫을 담당했는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을것이다. 권률장군이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3만여명의 왜병과 힘에 부치는 결사전을 하고있을 때 그 고장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석전을 하는 우리 군사들에게 부지런히 날라다주었다. 행주산성녀성들의 그 짧은 애국치마들은 후날 조선의 모든 가정부인들이 동자질할 때도 띠고 치레거리로도 띠는 맵시있는 앞치마가 되였다. 행주산성싸움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하여 그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
고려시기에 남복차림으로 전장에 달려나가 거란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무훈을 떨친 설죽화의 이야기 또한 유명한것이다.
력사는 설죽화와 같은 개별적인 녀걸들의 참군담은 더러 전해주고있지만 순수 부녀들로만 꾸려진 전투부대가 용약 전장에 진출하여 백병전을 벌린 전례가 있었다는 기록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진행한 유격전쟁에서는 녀성들이 간호원이나 재봉대원이나 취사원과 같은 보조적역할뿐아니라 전투원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해야 하였다. 일단 참군이 결정되면 녀성들도 무자비한 전쟁의 론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전쟁은 녀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정세가 요구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무거운 장구류를 이고지고 며칠씩 강행군도 해야 하고 언땅에 배를 붙이고 포화속에서 싸움도 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창격전에도 뛰여들어야 한다. 정치공작이나 식량공작을 위해 적구에 파견될수도 있고 살을 저미는것 같은 강추위속에서 토공일 같은것도 해야 한다. 엄동설한에 풍찬로숙하며 몇년을 싸워야 할지, 몇십년을 싸워야 할지 그것도 알수 없다.
이 모든 난관을 과연 녀성들이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지판에 녀성들을 끌어들이는것이 과연 옳은 처사로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음을 정할수 없는 일이였다.
길림시절부터 우리의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동무들가운데는 나에게 참군의 의사를 표시한 녀성들도 적지 않았다. 한영애도 눈물을 흘리며 유격투쟁을 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동만으로 나올 때 그를 억지로 북만에 떼두었다. 길림시절의 소년회원들가운데는 참군을 하고싶어 돈화에까지 따라온 녀자들도 있었고 중부만주에서 편지로 참군의사를 표명해온 녀동무도 있었다. 애국의 일념에 불타는 청들이였으나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다.
녀자들이 무장투쟁에 참가하겠다는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것은 남성들이나 할 일이다, 녀자들에게는 녀자들만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다, 녀성들을 뒤고방에서 끌어내다가 사회혁명에 참가시키는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들더러 어떻게 무장투쟁까지 하라고 하겠는가, 당시 나의 머리속에는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무장투쟁준비가 성숙되고 여기저기에서 유격대들이 련이어 무어지게 되자 참군을 열망하는 녀자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갔다. 지하조직들에서 활동하던 녀자들가운데는 남들이야 뭐라건말건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들어와 승인도 없이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는 동무들이 적지 않았다.
형세가 이쯤되자 우리는 녀성들의 참군문제를 정식으로 론의에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녀성참군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부 기혼자들은 두마디안팎에 그 가능성을 부정해버리였다. 녀성들은 집안일을 보고 남성들은 집밖의 일을 보는것이 조상전래의 관례이다, 리관린이 한때 피스톨을 차고 독립군을 따라다닌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천에 하나나 있으나마나한 경우이고 보통녀성들이야 어떻게 험한 산발을 타고다니며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유격활동을 하겠는가, 녀자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내는것은 모험이라고 하였다. 지어 어떤 동무들은 녀성참군문제는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고 우겨대였다.
그러나 차광수를 비롯한 다른 동무들은 그런 주장들을 즉석에서 일축해버리였다. … 당신들은 인류력사에 모권제가 오래동안 존재해왔고 그 모권제의 그늘밑에서 남자들이 녀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시대가 있었다는걸 인정하는가?
자식이 불속에 들면 그속에 선참으로 뛰여드는것도 녀자이다, 항차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는데 녀자라고 왜 가만히 앉아있겠는가, 녀성참군은 우리 누이들자신의 요구일뿐아니라 시대의 부름이라는걸 알아야 한다. …
결국 녀성참군에 대한 론쟁은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매번 공전만 거듭하였다. 우리는 남성청년들로 유격대를 조직한 뒤에 형세를 봐가며 후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미루어버린 녀성참군문제가 아무런 의견충돌도 없이 모두의 지지속에 매듭을 지을수 있게 되였는데 그 계기로 된것은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간도녀성들의 투쟁소식이였다. 화룡현의 대담무쌍한 두 녀성이 빨래방치로 일본순사를 까눕히고 보총을 빼앗아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어 녀성참군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리였다. 온 간도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서던 때였다.
조직을 통하여 무기획득의 중요성과 절박성을 깨달은 18살의 나어린 처녀 김수복은 적의 무장을 빼앗아낼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자기의 짝패처녀와 함께 빨래함지를 이고 강가의 외나무다리목으로 나갔다. 며칠전의 장마비에 다리는 떠내려가고 말뚝만 남아있는 빈 다리목이였다. 두 처녀는 종일토록 거기서 빨래하는 시늉을 하며 알맞춤한 기회를 노리였다. 해질녘이 거의다 되여서야 일본경관 한놈이 나타나 처녀들에게 자기를 업어 강을 건네달라고 호령하였다. 김수복이 경관을 업고 강물에 들어서자 짝패처녀도 부축해주는체 하면서 그를 따라나섰다. 강심에 이르자 김수복은 신발이 젖는다고 발버둥치는 경관을 물속에 처박고 빨래방치로 란장을 쳤다. 학살당한 부모들의 이름으로 원쑤를 료정내고 무기를 빼앗은 두 처녀는 1933년 여름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그때부터 김수복에게는 《빨래방치》라는 별명이 붙었다.
후날 우리 주력부대에서 재봉대책임자로 공작한 박수환도 역시 빨래방치로 적병을 까눕히고 무장을 빼앗아낸 녀성이였다. 여러명의 녀성들이 짜고들어 경찰놈들에게 술을 먹이고 단꺼번에 여러 자루의 무기를 빼앗아낸 실례도 있었다.
그 어떤 증서도  그들이 빼앗아낸 무기처럼  우리 녀성들이 도달한 새로운 정신적높이와  의지를 힘있게 증언할수는  없을것이다.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서는 녀성들이 자기 힘으로 탈취한 총을 손에 잡고 무장대오에 뛰여들고있었다.
녀성들의 이 급진적인 진출과 의미심장한 변화는 무엇을 말하여주는가? 어찌하여 푸성귀나 가꾸며 팔자를 한탄하던 녀성들이 수백년동안 자기들을 비끄러매고있던 봉건의 질곡을 대담하게 타파하고 용약 무력항전에 참가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는가? 그것은 손에 총을 잡고 나서는 길외에는 달리는 살수 없는 조선녀성들의 엄혹한 생활이 마련해준 필연적인 귀결이였다.
녀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은 속박의 사슬과 원한뿐이였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남존녀비를 계률로 삼아 모든 녀자들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구속하고 천대한것이다. 녀자는 아이를 낳고 음식이나 지어바치고 손이 오리발이 되도록 밭을 가꾸고 길쌈이나 하는 집안의 머슴과도 같이 치부되고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도 홀몸으로 늙어죽어야 하는것도 녀자였고 빚값에 팔려가는것도 녀자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이 모든 불행우에 녀성의 도구화, 상품화라는 불행을 덧얹어놓았고 망국노라는 치명적인 락인을 찍어놓았다.
항일혁명은 그 모든 액운과 부조리의 근원을 송두리채 쓸어버리는 폭풍이였으며 이 나라 녀성들을 혁명의 길로 인도해준 세기적인 사변이였다. 조선의 녀성들은 펜이 아니라 선혈로써 대지우에 자기의 새 력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녀성참군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그들을 더 잘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비록 총은 잡았어도 녀성은 역시 녀성인것만큼 유격전쟁을 하는 어려운 조건일망정 녀성고유의 생활을 유지해나갈수 있도록 해줘야 하였다.
유격대오에 녀성대원들이 생긴 때로부터 우리는 언제나 누이동생들을 돌보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총도 제일 좋은것을 주었고 잠자리도 제일 아늑한 곳에 정해주었으며 전리품도 제일 훌륭한것으로 골라서 분배하였다.
이러는 과정에 나는 그 특수우대의 격을 한층 더 높여 녀대원들로 따로 대오를 편성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단위와 군사행동단위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였다. 녀대원들만으로 따로 중대를 조직하게 되면 그들의 혁명적자부심과 열의도 한층 더 높여줄수 있고 자각성과 전투력도 최대한으로 발양시킬수 있으며 생활상불편도 덜어줄수 있다고 보았다. 전투원이 되게 해달라, 총을 잡고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학살한 원쑤놈들을 다문 몇놈이라도 잡아서 원한을 풀어야 하겠다는것이 녀대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재봉대에 가도 병원에 가도 작식대에 가도 녀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간절한 소망을 말하였다.
우리가 사령부에 직속된 녀성중대를 따로 꾸려야겠다고 확고히 결심한것은 무송에 나와 새 사단을 꾸릴 때였다.
그때 우리가 새 사단의 골간으로 삼은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가운데는 장철구, 김확실을 비롯하여 녀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민생단》혐의자료들이 불타 없어지고 어제날의 《민생단》혐의자들이 모두 무죄선언을 받았다는 소식이 날아가자 사처에 숨어있던 《민생단》련루자들이 우리를 찾아왔는데 그들가운데도 적지 않은 녀성들이 끼여있었다. 리계순, 김선, 정만금 등이 그런 녀성들이였다. 이불보따리를 이고 나타난 박록금처럼 개별적으로 찾아온 녀대원들도 여럿이였고 대첨창과 오도양차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새 사단에 편입한 군소부대와 함께 집단적으로 참군한 녀대원들도 여럿이였다.
우리가 미혼진밀영에 갔을 때 그곳 재봉대에 있던 김철호와 허성숙이 전투부대로 돌려달라고 어찌나 성화를 먹이는지 아무리 설복하여야 막무가내였다. 재봉대전원이 다짜고짜로 우리를 따라나서겠다는것이였다. 동무들이 우리를 다 따라나서면 군복은 누가 지어주겠는가고 하니 자기들을 대신할수 있는 병약한 녀대원들은 얼마든지 있다는것이였다. 알아보니 미혼진밀영에는 재봉대, 병원, 작식대들에 필요한 인원을 푼푼히 배당하고도 남을만큼 녀대원들이 많은것은 사실이였다.
남은 녀대원들을 전투중대에 배치하든가 아니면 그보다 더 실효성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녀성중대를 시범적으로 따로 무어볼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미혼진의 녀대원들만 가지고서는  1개 중대를 무을수 없었다.  력량이 부족하였다. 나는 최현에게 앞으로  녀동무들이 한사코 요구하면  녀성소대를  하나쯤  무어보라고  귀띔하여주었다.
《순수 녀성들만으로 전투중대를 하나 따로 무어주면 어떨것 같소?》
어느날 내가 박록금에게 넌지시 이런 말을 비치자 그는 대뜸 환성을 올리며 절대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산호와 리동학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순 녀자들끼리만 무어가지고 전투랑 꽤 치러낼가요? 녀자들만 있어가지고서는 사나운 왜놈무리들과 맞서 변변한 싸움을 해낼것 같지 못합니다. 중대와 소대들의 지휘를 남성들이 맡아해준다면 몰라도 …》
김산호의 말이였다.
《남성들이 지휘한다면 그걸 어떻게 녀성중대, 녀성소대라 할수 있겠소? 녀성중대면 지휘도 녀성들이 맡아하게 해야지.》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동무네는 무슨 사관학교나 군사대학을 다녀서 지휘관이 되였소?》
김산호는 말문이 막히였으나 여전히 석연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리동학도 《녀성중대라, 녀성중대라…》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우리가 녀성중대에 대한 문제를 화제에 올리자마자 김주현은 펄쩍 뛰였다. 순수 녀성들만으로 중대를 편성하여 전투장에 내보내면 싸움을 망치고말터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우리가 만강부근에서 녀성중대조직준비를 한창 하고있던 1936년 4월경에 불쑥 남녀혼성부대가 우리앞에 나타났다. 남녀혼성이라지만 그속에 남성대원은 4~5명뿐이고 나머지는 김철호, 허성숙, 최장숙, 황순희를 포함하여 전부가 녀성들이였다.
내가 김철호에게 동무는 앓는 최현동무를 내버리고 무슨 일로 여기 왔는가고 묻자 그는 바로 최현이 보내서 왔다고 하였다. 병을 털고 일어난 최현은 녀대원들이 자꾸만 전투원으로 돌려달라고 성화를 먹이자 그중 시끄럽게 구는 건강한 녀대원들만 따로 추려 소부대를 무어주면서 나한테 찾아가면 알도리가 있다고 하더라는것이다. 분명 녀대원들한테서 당하는 성화를 우리한테 밀어버리고 그들의 운명문제까지도 우리의 처분에 맡기자는 심산이였던것 같다.
김철호네 녀성소부대 대장은 조동무라고 부르는 애젊은 남성대원이였다. 햇병아리같은 신입대원이 녀성소부대의 대장으로 대렬을 인솔해온것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허성숙은 《우리 같은 치마들이야 뭐 최현동지의 안중에나 있습니까. 밥이나 시키면 고작이지 어디 대장질을 시키겠답니까?》 하고 볼부은 소리를 하였다.
그  녀성소부대의  부책임자도  역시  태병렬이라고 하는  키가  자그마한  애젊은  신입대원이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대렬을 관리하고 인도해온것은 키꼴이 장대한 최장숙이였다. 그는 총과 배낭외에도 쌀이 한자루 가득 들어있는 무쇠가마와 작식도구들, 도끼와 톱까지 지고왔는데 사람보다 짐이 더 컸다. 허성숙의 짐도 최장숙의것에 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 유격대생활을 해오는 과정에 남녀를 불문하고 최장숙이와 허성숙이처럼 많은 짐을 진 대원은 나도 처음 보았다. 최장숙의 짐을 받아내리워주었는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힘에 부쳤다.
《힘장사로구만!》
내가 못내 감탄하자 태병렬이 《그 누님은 한끼에 만두를 100개나 널름하였습니다. 60개를 널름하고 보초를 선 다음에 다시 40개를 더 꿀꺽했는데 아무 탈없이 다 소화시킨 녀장수입니다.》 하고 벌쭉거렸다. 그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최장숙은 태병렬에게 눈을 흘기면서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무슨 거짓말이겠소? 한끼에 만두 100개쯤 제껴대지 않고서야 이렇게 엄청난 짐을 져낼수 있겠소?》
내가 태병렬을 두둔해주자 모두들 또 한바탕 웃음판을 터쳤다.
그날 나는 슬쩍 남녀대원들의 힘내기를 조직하였다.
곰같이 힘이 세다고 공인돼있는 한 남대원을 불러내여 먼저 허성숙이 벗어놓은 배낭을 져보라고 하였다.
그는 호미자루로 잔뼈가 굵어졌다는 사람인데 왕청일판에서는 상등씨름군으로 소문났었다. 앉은자리에서 찰떡을 맹물에 묻혀 35개까지 먹었다는 떡보이기도 하였다.
그 대원은  허성숙의 짐을 지고 수월히 일어났다.  나는 토퉁 두자루를 메워주면서 그 짐과 총을 가지고  휴식없이 얼마만한 거리까지 행군할수 있을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한 10리쯤은 쉬지 않고 갈것 같다고 하였다.
다음은 최장숙의 짐을 져보라고 하였다. 장숙의 짐을 진 그는 땅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다시금 토퉁 두자루를 메워주며 이번에는 얼마만한 거리를 행군할것 같은가고 물으니 고작해서 5리쯤 갈수 있을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다.
최장숙에게 그 짐을 지고 얼마나 행군했는가고 물어보자 그는 쑥스러워 말을 못하였다. 김철호가 그를 대신해서 대포시하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여기까지 쉼없이 행군해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자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포시하에서부터라면 거의 10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남대원과 최장숙의 힘내기에서는 최장숙이 이긴셈이였다. 나는 허성숙을 시켜 대포시하부근에서 녀성소부대가 겪은 전투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하였다.
허성숙은 얼굴이 거밋거밋하고 몸이 다부지게 생긴 녀대원이였다. 인정이 많은 대신 입이 무겁고 말수더구가 적었다. 그러나 요긴한 말은 꼭 하고야마는 곧고 대바른 성미였다.
최장숙을 《선봉장》으로 하는 녀성소부대는 우리를 찾아오던 도중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던 끝에 산중에서 어떤 반일부대를 만나 그들과의 공동작전으로 대포시하부근의 어느 집단부락을 기습하였다. 녀대원들은 그 전투에서 남대원들에 못지 않은 투지를 발휘하였다.
반일부대병사들은 좋은 신식총을 가지고있었으나 퇴각했던 위만경찰대가 반격을 가해오자 겁이 나서 뿔뿔이 도망쳤다. 하지만 최장숙이네 녀성소부대는 구식토퉁을 가지고서도 적들을 본때있게 족쳐댔다. 그들은 반일부대가 차지하고있던 계선으로 달려드는 적들까지도 다 도맡아 료정냈다.
특히 그날 보초를 섰던 녀대원이 아주 희생적으로 잘 싸웠다. 옆구리에 총상을 당하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적들을 완강하게 견제하였다. 그의 총알에 맞아 여러명의 적병들이 연방 거꾸러졌다. 그러자 시체를 끌고 달아나는 놈들이 나타났다. 녀성전투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에로 넘어갔다. 반일부대 대장은 도망치는 자기 부하들에게 《개자식들! 조선녀자들은 토퉁을 가지구두 저렇게 용감하게 싸우는데 너희들은 도망을 쳐.》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렬을 리탈했던 반일부대 대원들은 그제서야 대오에 돌아와 추격전에 합세하였다. 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그 전투담을 듣고는 모두가 녀대원들의 용감성과 대담성, 견인불발성에 감탄하였다.
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속에서는 녀성중대의 탄생이 정식으로 선포되였다. 우리는 이 중대를 사령부직속으로 두고 소대와 분대들을 직접 편성해주었다. 첫 중대장으로는 박록금이 임명되였다.
녀성중대는 우리 나라 군건설력사상 처음으로 생겨난 녀성전투구분대였다.
녀성중대의 탄생은 수천년동안 고질화되여왔던 남존녀비사상과 인습을 타파하고 녀성들의 정신적지위와 사회적지위를 실제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수평선상에 올려세운 하나의 사변이였다.
예로부터 남존녀비가 가장 우심하게 적용되고 발현되였던것은 정치분야보다도 군사분야였다. 물론 정치분야에서 녀성들의 참정권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마력과도 같은 녀성의 남성에 대한 은페된 지배력이나 영향력이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미쳐 국가의 존망까지도 좌지우지한 실례는 허다하다.
하지만 정치분야에서는 때때로 제왕이나 군사령관보다 더 힘이 있었다고 하는 녀성들도 군사분야에 들어가서는 별로 맥을 추지 못하였다. 군사는 거의 남성들의 독점물로 되여왔다. 우리는 군사분야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함으로써 비록 우리 혁명군에 국한된것이기는 하지만 녀성해방을 실제로 이룩하였다.
녀성중대의 출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민족적인 폭과 인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었다.
혁명군에 녀성중대가 있고 그 녀성중대의 대원들이 남성군인들 못지 않게 잘 싸운다는것은 미구에 전민족이 다 아는 사실로 되였고 세계를 경탄시키는 의의있는 화제거리로 되였다.
1930년대 후반기 우리 나라의 국내신문에는 《김일성부대에는 녀대원도 10여명》이라는 보도기사가 실린적이 있었다. 짤막한 글이였지만 그 기사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던진 파문은 대단히 컸다.
녀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손에 총을 잡고 항일무장대오에서 용감하게 싸운다는 소식은 조선의 모든 녀성들과 인민대중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그 소식은 국내와 해외에서 인민혁명군에 입대할것을 열망하는 수많은 참군지망자들을 낳게 하였다.
우리는 녀성중대를 조직한 후 그가 제발로 걸어나갈수 있도록 세심히 돌봐주고 이끌어주었으며 실전을 통하여 그들을 단련시키였다. 녀대원들의 정치적열의와 자각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감화시킬수 있는 이야기도 해주군 하였다.
소탕하에 머무를 때 녀성중대원들에게 김스딴께위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던것이 생각난다.
김스딴께위츠란 로씨야에서 나서자라 전 생애를 공산주의위업에 바친 이름난 조선인녀성투사이다. 그의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원군(새별군)이였다.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일찌기 소학교 교사가 되였으나 로령으로 찾아오는 교포들과 망명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교원생활을 그만두고 울라지보스또크에 가서 로씨야 각지에 널려있는 조선인로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짜리가 타도된 후 볼쉐비크당에 가입한 김스딴께위츠는 남편과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10월의 전취물을 수호하기 위한 직업적인 혁명의 길에 나섰다. 그는 하바롭스크에 있는 볼쉐비크당 원동부에서 대외사업을 맡아보는 한편 조선인독립운동자들인 리동휘, 김립 등을 추동하여 한인사회당을 조직하도록 열정적으로 떠밀어주었다.
김스딴께위츠의 눈부신 활동은 연해주지방은 물론, 로씨야에 있는 모든 조선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으며 적극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원동의 형세가 반혁명에 유리하게 전변되고 볼쉐비크당 원동부가 하바롭스크에서 철수하게 되였을 때 김스딴께위츠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뒤처리를 마무리한 다음 기선을 타고 떠나다가 불행하게도 아무르강에서 백파도당에게 체포되여 총살당하였다. 최후순간을 앞두고 그는 적들을 향하여 절규하였다.
《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다. 비렬하고 악독한 너희들의 운명도 오래지 않다. 상가집 개무리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린다는것은 망상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였다.
김스딴께위츠와 함께 설죽화, 계월향, 류관순, 리관린 같은 명인녀걸들도 우리 녀대원들의 친근한 정신적벗으로 되였다.
녀성중대는 세상에 태여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어디에 가나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였다. 오각별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어깨에 기병총을 멘 녀대원들의 모습이 먼발치에 얼핏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은 《녀자군대가 왔다!》고 소리치면서 동네방네를 뛰여다니였다.
녀성중대가 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된것은 우선 녀대원들이 어떤 정황에서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가지고 성심성의로 인민을 도와주고 존대하면서 처신을 잘한데 있었다. 우리는 어느 부락에 주둔할 때나 주인집 뜨락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터밭의 김을 매주는 녀대원들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녀대원들은 인민들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글도 가르쳐주었다. 녀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였고 진귀한 꽃이였다.
사실 발족초기의 녀성중대는 무기가 변변치 못하였다. 대부분이 구식토퉁이였는데 개중에는 그런 총마저 못가진 대원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볍고 맵시있는 기병총을 메워주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몇차례 전투도 조직했지만 기병총은 좀처럼 맞다들지 못하였다.
그러던중 시난차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수비대가 말을 타고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였다. 정찰을 통하여 그 수비대가 병실공사를 벌리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공사장습격전투를 결심하고 그 과업을 녀성중대에 맡기였다. 그리고 그들을 고무해주려고 공사장가까이에까지 같이 갔다. 그 전투가 아주 인상적이였다.
금시 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릴것 같은 날씨여서 적병들은 작업을 중지하였고 보초병도 경계를 늦추고있었다. 박록금중대장이 울린 신호총성과 함께 공사장근처에 매복해있던 녀대원들은 비호같이 달려나가 적들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여기저기에서 《손들엇!》, 《손들엇!》 하는 녀대원들의 야무진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적병 하나가 총가에서 총을 꺼내들고 반항을 시도했으나 장정숙이 날쌔게 총탁으로 까눕히였다. 전투는 10분도 못되는 사이에 결속되였다. 몇명을 살상하고 나머지는 전원 포로하였다. 전투에서 수십정의 저격무기들을 로획했으나 아쉽게도 전리품들중에는 기병총이 한자루도 없었다.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기병총은 기마순찰을 나간자들이 다 메고 갔다는것이였다. 포로들은 자기들을 습격하고 사로잡은것이 녀성유격대라는 사실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녀성중대는 그후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대영전투와 동강전투도 녀성중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한 전투였다.
그들은 어느 전투에서나 잊을수 없는 무훈담을 남기였다. 장정숙은 대영전투때 총알이 아까와서 적보초를 주먹으로 단매에 쳐눕히고 돌격로를 열었다. 김확실을 비롯한 3명의 녀대원이 어스름한 달빛속에서 각각 한발씩 총을 쏘아 적의 경비전화선을 잘라버렸다는 신비한 이야기는 동강전투가 남긴 기담이다. 력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녀성중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하의 함경남도경찰부가 여러건의 기록을 남기고있다고 한다. 거기에는김일성부대의 부녀대원 박록금이하 40여명이 소화 11년(1936년) 음력 5월 초순경 무송현 시난차의 위만군수비대를 공격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같은 시기에 그들이 대영을 습격하여 장총 10여정과 군복 등을 로획해갔다는 사실도 기록되여있다. 녀성중대가 진행한 무송현 동강전투에 대한 기록도 있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항일혁명렬사들의 군상을 돌이켜볼 때마다 나는 그 군상의 한복판에 있는 녀성중대원들과 대담무쌍한 녀장부들을 추억하게 된다.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박록금은 중대를 잘 통솔하였다. 많은 전우들은 박록금의 특징을 단마디로 녀장부라고 규정하였다.
박록금이 지금의 41문짜리 지하족을 신고다녔다고 하면 아마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유격대의 전리품들중에 지하족 같은것이 많았지만 그렇게 큰것은 드물었다. 그래서 박록금은 초신을 많이 신고다니였다.
박록금은 왕청에 있을 때 구부녀회주임까지 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녀성활동가였다. 집살림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결혼할 때 이불 한채 마련하지 못하고 누데기차림으로 혼례를 치르었다. 남편 강증룡이네 집안도 역시 살림이 째지게 가난해서 신랑신부가 첫날 덮고잘 이불조차 마련해주지 못하였다. 부부는 한날한시에 입대하여 왕청유격대 1중대에 배속되였다.
어느날 1중대 정치지도원은 나를 찾아와  박록금이 방금전에 해산을 하였는데  그가 가있는 친정집에는 포대기 하나 만들만 한 천조차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 말을  듣고 부랴부랴 가보았더니 정말 이불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것도 보이지 않았다.  홀아비살림에  딸의 시중까지 드느라고 쩔쩔매던 박록금의 아버지는 자기네는 란리통에 너무나 여러번 곤두박질을 하다보니 이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까마득하다고 하였다.  갓난애기는 헌누데기에 싸여있었다.
나는 곧 소부대를 파견하여 이불과 포단감을 마련하였다. 재봉대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그 천으로 두툼하고 푹신한 이불과 애기포단, 애기옷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박록금이네 부부는 애기옷과 애기포단은 갓난애에게 입혀주고 덮어주면서도 이불만은 쓸 생각을 하지 않고 큼직한 보자기에 싸서 궤짝우에 고이 얹어두기만 하였다. 살을 에이는 혹한에 등뼈가 가드라들 때에도 그것만은 다치지 않았다.
강증룡이 7중대 소대장이 되여 안도독립련대로 떠나간 후부터 줄창 왕청부대에서 생활해온 박록금은 남편이 속한 부대가 우리 부대에 편입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올 결심을 하였다. 그는 친정집을 떠날 때 우리가 해준 이불을 아버지에게 넘겨주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김대장이 너희들을 위해 마련해준 소중한 이불인데 너희 부부가 덮어야 한다면서 기어이 그 이불을 가지고 떠나게 하였다.
박록금이 이고온 이불보따리는 그대로 그의 별명이 되고말았다. 전우들은 이름대신 그를 《이불보따리》라고 불렀다.
박록금은 겉보기에는 성미가 무뚝뚝한것 같았지만 속이 깊고 인정미가 있는 녀성이였다. 붙임성이 좋아서 지하공작에도 적임자였다.
이런 점을 참작하여 1937년초에 우리는 그를 장백현 신흥촌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임무는 권영벽과 리제순을 도와 장백현 상강구일대의 녀성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세우는것이였다. 박록금은 그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던중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리제순처럼 남들이 한 일까지 자기가 다했다고 진술함으로써 적지 않은 혁명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였다.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지들이 맥을 놓고 감방안에 쓰러져있을 때면 혁명가요를 불러 그들을 일으켜세웠다.
박록금이 혜산경찰서에 갇혀있다가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였을 때 적들은 그를 결핵환자가 있는 감방에 밀어넣었다. 병에 전염되여 감옥귀신이 되라는것이였다. 그 결핵환자는 정평농조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김가성을 가진 녀성이였다. 박록금은 일신의 건강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중태에 놓여있는 그 녀성을 살붙이처럼 간호해주었다.
사경에 이른 그 녀성은 얼마후 병보석으로 놓여나갔는데 그 대신 박록금이 병에 전염되여 눕게 되였다. 가석방된 그 녀성의 가족들이 신세를 갚는다고 하면서 명주저고리와 떡을 해가지고 감옥으로 찾아왔으나 감옥당국은 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 남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기울여온 이 인정많은 유격대의 녀장부는 그 녀성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한 눈물겨운 지성마저도 받아보지 못하고 모진 병에 시달리다가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의 녀대원들중에는  마동희의 누이동생 마국화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서간도지방에 나가서 활동할 때 17도구 평강덕에서 우리 부대 정치공작원인 김세옥의 영향을 받아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김세옥은 마국화의 스승인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였다.  조국의 해방을 성취한 다음에 가정을 이루기로 약속한  그들은  모든것을 미래에 맡겨두고  오로지 혁명을  위해서만 분투하였다.
어느날 작식공작을 하던 마국화는 부엌에서 강낭죽을 퍼서 전우들에게 나누어주다가 두사람 몫이 모자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두몫중 한몫은 자기가 굶으면 되는데 나머지 한몫은 누구를 굶겨야 하는가. 이런 어려운 사정앞에서 마국화는 망설이기만 하다가 김세옥의 량해를 받아볼 결심을 하였다.
그는 병실밖으로 김세옥을 불러내다가 딱한 사정을 하소하였다.
《세옥동무, 량해하세요. 오늘 저녁만은 동무의 몫이 없는걸로 여기고 굶어주세요. 참 안됐어요.》
《안되다니? 이런 때에야 응당 내가 굶어야지. 그 대신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는 매끼 곱배기를 한다는걸 미리 선언하는바이요.》
김세옥은 이런 롱까지 하고나서 밝은 낯으로 돌아섰다.
그날 밤 마국화는 맹물로 끼니를 굼땐 애인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가 굶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조국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마국화가 전사한 후 녀대원들은 그의 배낭속에서 한쌍의 학을 수놓은 이불거죽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마국화가 궂은비와 눈속에서 마련한 결혼지참품이였다.
세상에 이보다 값지고 이보다 슬픈 지참품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녀전사는 거치른 황야에 쓰러지고 꽃피지 못한 꿈만 이국땅에 남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녀대원들은 그 이불거죽으로 고인의 시체를 감싸주었다.
녀성중대는 탄생후 반년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하였지만 조국이 영원히 기억하고 인민이 길이길이 따라배울 불멸의 위훈을 남기였다.
항일혁명의 1선에서 무장을 잡고 강적 일제를 상대로 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려온 녀전사들이야말로 현대 조선녀성들의 빛나는 귀감이며 인류해방투쟁사에서 참다운 전형으로 내세울수 있는 녀성영웅들이다. 그들은 녀성들의 사회적, 인륜적평등을 남먼저 이룩하고 우리 나라 녀성해방의 길을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였다.
우리 로동당시대는 항일혁명투쟁시기 녀성중대원들이 발휘한 백두의 혁명정신과 투쟁전통을 이어받은 무수한 녀성영웅들과 녀성활동가들, 녀성로력혁신자들을 배출하였다. 안영애, 조옥희, 리수덕, 리신자, 정춘실 등을 비롯하여 우리 시대가 낳은 녀성영웅들의 사고와 실천을 지배한것은 백두의 넋이였다. 우리의 수백만 녀성들은 오늘도 이 넋으로 이 땅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사회주의보루를 쌓아가고있다.
오늘 우리 인민군대에는 항일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녀성구분대들이 있다. 총을 잡고 조국의 방선을 지키고있는 녀전사들은 비단 인민군대의 녀성구분대들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들에도 총을 잡은 녀대원들이 수두룩하다. 전민무장화를 실현한 우리 나라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있는 1, 000만의 녀성전체가 유사시에 조국의 촌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총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다.
이 1, 000만 녀성무장대의 원형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직속 녀성중대였다.

3. 《피바다》초연무대

항일혁명시기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였다고 본다. 원작들도 대부분 발굴되고 그것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복각하는 사업도 십중팔구는 끝났다고 할수 있다. 항일의 불길속에서 태여난 문학과 예술은 지금 우리 당의 문예전통으로 되고있으며 우리 나라 문학예술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귀중한 재보로 되고있다.
나는 직업적인 학자들처럼 항일혁명문학이나 예술을 두고 리론을 전개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만강에서 우리 부대가 진행한 공연활동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만강에서의 공연활동을 소개하면 항일혁명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의 예술작품을 완성하는 일이 하나의 성시를 치는 전투에 못지 않게 어렵고 복잡한 정신로동을 요구하는 일이라는것을 우리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연예활동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활동에 도움이 될수 있는것이라면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았다.
만일 우리 유격대오에 종군작가나 예술인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우리는 창작과 창조의 진통과 고뇌를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되였을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부대에는 직업적인 작가나 예술인출신대원들이 한명도 없었다.
물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성과와  우리의 명성에  고무되여  참군을 시도한  문인들은  있었다.
만일 그들의 참군이 원만하게 실현되였더라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자기의 행적을 수록할수 있는 력사기록필진과 대내출판물의 발간과 연예공연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재능있는 창작집단을 꾸려가지고 강력한 선전선동활동을 전개하였을것이다.
우리 대오에는 력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력사기록은 비전문가들이 하였다. 우리 부대의 대표적인 력사기록자는 리동백과 림춘추였다. 그들이 기록을 많이 남기느라고 하였지만 대부분은 인멸되였거나 소실되였다.
우리 학자들은  해방후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조건에서  항일혁명력사를 연구하는데 달라붙었다.  대부분의 력사자료들은 항일혁명투쟁참가자들의 회상에 기초하여 작성되였으며 적측의 문건들도 많이 참고하였으나 어떤 자료는 외곡되거나 과장, 왜소화된것들도 있어 결국 력사를 체계화하고 고착시키는데서 적지 않은 난항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게다가 선전부문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반혁명종파분자들의 방해책동과 무관심으로 하여 항일혁명력사와 관련된 전면적인 자료수집은 1950년대말에 와서야 시작되였다.
항일혁명력사를 반영한 우리의 책자들에서 부분적이기는 하나 날자와 장소들이 약간씩 엇갈리는것은 이런 특수한 실정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항일투사들은 력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력사를 창조하기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후대들이 우리를 기억해도 좋고 기억 안해도 좋다는 립장을 가지고 만난을 이겨냈다. 만일 우리가 력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총을 잡은 사람들이였더라면 우리는 오늘 후대들이 항일혁명력사라고 부르는 위대한 력사를 창조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적의 포위와 추격속에서 위치를 부단히 바꾸어가며 유격전을 벌린 우리였던것만큼 비밀로 될수 있는 한장의 문건마저도 안전하게 간수할수 없었다. 우리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적구에서 오는 쪽지편지도 보는족족 제때에 태워버리군 하였다. 사료적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문건들이나 사진자료들은 배낭속에 넣어서 국제당에 보냈다.
1939년에도 우리는 국제당에 여러 배낭의 문건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문건들은 목적지까지 가닿지 못하였다. 그때에 류실된 자료들중 적지 않은것들이 일제경찰문건들과 출판물들에 반영된것으로 보아 호송자들은 분명 중도에서 적들에게 피살된것 같다. 우리가 조국으로 개선할 때 가지고온것이 있다면 그것은 력사기록이나 조직관계의 문건이 아니라 혁명가요들을 적어넣은 수첩과 전우들의 주소성명을 적은 비망록뿐이였다.
우리 학자들이 항일혁명력사를  연구하는데서 제일 큰 애로로  느끼고있는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우리 혁명이 안고있던 특수한 사정과 복잡한 내면을 잘 알지도 못하는 제국주의앞잡이들과 매문가들, 부르죠아어용학자들은 몇건의 문서장에서 따온 수자들과 사실들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자기 조국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한 조선의 아들딸들이 육탄으로 개척해온 항일혁명력사를 어떻게 하나 보잘것 없는것으로 만들어버리려고 무진애를 다 쓰고있다.
우리의 리념과 사회제도를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당의 혁명력사를 왜소화하기 위해 온갖 독설을 다 퍼붓는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며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력사란 먹으로 지울수도 없고 불로 태울수도 없으며 검으로 찢을수도 없는것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간에 우리의 력사는 력사대로 남아있을것이다.
우리가 《피바다》를 구상하고 그 대본작업에 착수한것은 동강회의 직후였다고 생각된다. 연극 《피바다》를 창작하게 된 기본연원은 《간도토벌가》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나는 어린시절에 아버지한테서 《간도토벌가》를 배웠다. 아버지는 나와 나의 동무들에게 간도《토벌》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군 하였다.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부대를 이끌고 동만에 가니 그 지방 사람들은 일본군경들의 《토벌》로 하여 형언할수 없는 시련을 겪고있었다. 《토벌대》의 군도와 총창끝에서 하루에도 수십명, 지어는 수백명씩 무리죽음을 당하는 대살륙의 참사가 끊임없이 빚어지는 간도땅은 문자 그대로 피바다였다.
나는 그 피바다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배워준 《간도토벌가》를 상기하였으며 《간도토벌가》를 상기할 때마다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초와 수난을 두고 울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간도에 살고있는 절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이 그런 참혹한 운명앞에서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총대와 곤봉을 틀어잡고 분연히 일어나 항쟁을 계속하고있는 사실이였다. 이 거족적인 항쟁에는  삼강오륜과  삼종지도에 구속당하던 녀인들과 그 녀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밥투정질을 하던 아이들까지도  다 참가하였다.  나를 크게 감동시킨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였다.
녀성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변혁운동에 뛰여든것은 하나의 혁명이였다. 나는 이 혁명의 주인공들에 대해서 다함없는 존경과 사랑을 느끼였다. 그들을 지지하고 동정하는 과정에 나의 머리속에서는 희생된 남편의 뒤를 이어 혁명의 길에 나선 한 녀인과 그의 자식들의 형상이 무르익어갔다.
그 당시의 솔직한 내 심정은 그런 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고싶은것이였다.
우리는 무송땅에 여러날 머무르는 동안 도처에서 연예공연무대를 펼쳐놓고 인민들을 교양하였다. 싸움을 한번 하고는 눌러앉아 공연을 하거나 공연을 못할 정황이면 선동연설이라도 한바탕 하고서야 부대를 철수시키였다. 혁명군대원들이 소박한 예술소품들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언제인가 우리 동무들이 싸움끝에 열린 오락회에서 《간도토벌가》를 부른적이 있는데 그때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눈물을 뿌리며 일제를 저주하고 항일을 결의하였다. 《간도토벌가》 하나만으로도 울음바다를 펼쳐놓게 된 오락회장의 돌발적인 정경은 나로 하여금 연극종목과 같은 본격적인 무대형상으로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계몽시키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치 않아 그 욕망을 실현할수 없었다.
그런데 동강회의가 끝난 다음 리동백이 뜻밖에도 묻어두었던 그 욕망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때 그는 어느 마을에선가 신간문예잡지 한권을 가지고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잡지에는 감옥살이를 하는 한 사회운동자의 안해를 취급한 소설이 실려있었다. 남편이 감옥에 들어간 다음 그 안해가 어린 아이를 남에게 주고 다른 남자에게 재가해간것을 줄거리로 엮은 소설이였다.
나는 리동백에게 그 소설의 독후감을 물었다. 그러자 리동백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쓸쓸해지지요. 생활이란 이런것인가 하구.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러면 선생은 … 그 소설에 진실이 반영되여있다는겁니까?》
《진실의 일단이야 반영되여있지요. 슬픈 일이지만 내가 잘 아는 사회운동자의 안해도 다른 놈팽이와 정분이 깊어져서 아이를 버리고 달아난 일이 있습니다.》
《그런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을 어떻게 진실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조선과 만주에서 내가 본 절대다수의 녀성들은 다 남편에게도 충실하고 자식들에게도 충실하고 이웃에도 충실하고 나라에도 충실한 그런 녀성들이였습니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면 오히려 그를 대신해서 작탄이나 삐라뭉치를 품고 혁명사업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녀성, 남편이 혁명을 하다가 쓰러지면 군복을 떨쳐입고 그가 섰던 대오에 들어서서 총칼로 원쑤를 치는 녀성, 자식들이 배를 곯으면 동냥자루를 안고 문전걸식을 해서라도 아이들이 굶지 않게 천신만고를 다하는 녀성!
이것이 바로 조선녀성들입니다. 만일 이 진면모를 보지 않고 리광수와 같이 혁명가의 안해들을 모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서울장안에서 맥주병세례를 받은것처럼 빨래방치의 세례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나 누이들의 빨래방치는 무장을 탈취할 때만 쓰는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동백선생, 어떻습니까?》
리동백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더니 돌변하여 내 말에 수긍하였다.
《옳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나는 진실의 반영을 문학의 본도로 알고있었다. 진실을 반영해야만 문학은 독자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할수 있는것이다. 진실의 반영으로써 인민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하는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의 참사명이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수한 녀성투사들과 녀성활동가들, 덕행과 정절에서 모범으로 내세울수 있는 렬녀들을 두고 오래도록 담화를 하였다.
담화가 끝날무렵에 리동백은 나를 보고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장군님, 녀성혁명가의 운명을 취급하는 연극을 하나 만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선생이 어떻게 되여 갑자기 연극생각을 하게 되였습니까? 혹시 간도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들을 데리고 연극운동을 하던 생각이 나서 그러는게 아닙니까?》
《이런 서푼짜리 소설을 써내는 사람들에게 좀 자극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문제의 그 잡지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였다.
나는 그에게  녀성혁명가를 취급하자는것은 아주 좋은 착상이다,  그런데 연극작품을 하나 만들자면  무슨 주제가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선생이 주제를 생각한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참된 조선녀성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주제입니다. 조선녀성의 실상을 보여주는거지요. 조선사람들이 겪고있는 민족적수난은 필연코 녀성들까지도 투쟁의 길을 걷지 않을수 없게 한다, 투쟁만이 살길이다, 이런 주제인데 장군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가 설정한 주제는 간도에 있을 때 녀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설계하면서 내가 탐구하던 주제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이왕이면 선생이 직접 붓을 드는것이 어떻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꺼내자 《대통령감》은 펄쩍 뛰였다.
《저는 시비나 할줄 알지 창조할줄은 모릅니다. 그 연극대본은 장군님이 쓰셔야 합니다. 써주시기만 하면 무대형상은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동백의 그 청을 받은 다음부터 나의 머리속에서는 내가 이미 생각하고있던 녀주인공, 피바다속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디디고 결연히 일어나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 소박한 녀인의 형상이 더욱 뚜렷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매력적인 형상은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나는 종이장에 펜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부대가 만강에 도착할 그무렵에는 대본작업이 절반남짓하게 진행되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연극창작은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우리는 무송에 있을 때도 연극공연을 하였고 길림과 오가자에서도 연극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개시하면서부터는 무대에 연극을 많이 올리지 못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 유격근거지에서 연극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길림시절처럼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종목들에 유격구의 예술애호가들은 정열을 많이 기울일수 없었다.
그렇다면 백두산을 향해 남하행군을 하는 그 어려운 로정에서 우리는 왜 한사코 연극창조를 일정에 올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던가.
우리는 대중을 의식화하는데서 연극예술이 노는 비상한 견인력과 효과성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당시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장을 잡아흔드는 예술이 별로 없었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발전되고 그것이 한 나라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판도에서 보급되기 전까지 연극은 예술계에서 그 어느것에도 비교할수 없는 위력한 감화력을 가지고있었다.
나도 연극구경이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창덕학교시절의 나의 동창생들가운데는 연극애호가들이 많았다. 이름난 극단이 평양에 와서 순회공연을 할 때마다 나는 강윤범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군 하였다.
연극은 누구나 다 보고 즉석에서 《좋다!》, 《나쁘다!》, 《쑬쑬하다!》하고 평가할수 있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예술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연극의 개화기, 전성기였다. 내가 창덕학교를 다니던 그무렵에는 벌써 종래의 《신파극》을 밀어제끼고 신극이 대두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하였다.
진보적작가, 예술인들은 무산대중을 위한 프로레타리아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였다. 프로레타리아연극운동자들은 극단을 꾸려가지고 지방의 로동자, 농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런 극단들이 평양에도 연방 내려왔다.
해방후 우리 연극계에서 이름을 날린 황철, 심영 등도 다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던 예술인들이다.
그 당시는 어디서나 연극, 연극 하고 소리칠 때였다. 학생수가 50명쯤 되는 시골학교들에서도 연극을 한다고 떠들었다. 이러한 시대적풍조에 편승하여 우리도 초기혁명활동시기 연극운동을 벌리였다.
《피바다》대본을 완성하는 과정은  집체적지혜의 발현과정이기도 하였다. 극의 구성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하나의 세부,  한두마디의 대사를 위해서도  우리 동무들은  귀중한  조언을 주었다.
동강에서 무송현성전투승리를 총화하는 반일부대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끝낸 다음 나는 주력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의 서쪽 위성구역인 만강으로 향하였다.
만강은 드넓은 고원우에 올라앉아있는 백두산아래의 첫 동네이며 무송현 남단의 마을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되골령을 넘으면 장백땅이고 서남쪽으로 로령을 넘으면 림강땅이다.
1936년 당시의 만강은 80여호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산재부락이였다. 이 화전민촌은 남전자, 양지촌, 말리허, 두지동과 더불어 무송지방에 흔치 않은 조선인부락의 하나였다. 안도와 달리 무송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현성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만강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심심산촌이였다. 인총이 설핀데다가 오고가는 나그네들의 발길마저 뜸해서 어찌보면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절해고도와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길손이 좀 있다면 얼레빗이나 물감따위를 가지고 사구려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행상이 아니면 소금장사 같은 사람들뿐이였다. 무송의 유지들가운데도 만강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진용총관이 한두번쯤 다녀갔을가. 그의 후임으로 총관이 된 연병준이나 대여섯번쯤 다녀갔겠는지.
말이 난김에 연병준이 어떤 사람인가를 좀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홍범도휘하의 한 부대장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홍범도독립군이 연해주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무슨 연줄로 해서인지 무송에 와서 한동안 총관의 자리에 앉아 정의부의 지방장관으로 일하였는데 군중의 인망이 높았다.
그후 연병준은 총관직에서 물러나 대포시하에서 침통을 잡고 의원노릇을 하였다. 대포시하란 마을은 안도에서 돈화로 넘어가는 곳에 있었다. 한번은 김산호가 그 마을에 다녀와서 연의원의 의술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자랑을 하며 나도 한번 치료를 받아보라고 거듭 권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연병준을 찾아갔다. 연의원은 나의 맥을 짚어보고나서 장군의 신기가 이만저만 허약해지지 않았는데 록용이나 산삼을 구할수 있는가고 하면서 구할수 있으면 자기가 약화제를 써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가 만들어준 약화제를 가지고 약을 써서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썩 후의 어느해인가 한 일군이 몸이 허약해서 좀 고생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포시하에서 연병준이 만들어주던 약화제를 머리속으로 더듬어보면서 그에게 어떠어떠한 약을 써보라고 권고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몇달후 내가 내린 처방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은 나의 처방이 아니라 수십년전에 만주에서 연병준이라는 의원이 써준 약화제라고 하였다.
그 연의원이 무슨 연유로 해서인지 만강을 썩 잘 알고있었다.
만강의 특산물중에서 자랑할만 한것은 감자이다. 이 고장의 감자는 내도산감자처럼 갓난애기들의 베개통만큼씩 되는것도 있었다. 만강천에는 열묵어가 많았다.
만강부락 주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은 전부가 나무를 파고 깎아서 만든 목기가 아니면 봇나무껍질을 오그려 만든 목피그릇이였다. 숟가락도 나무를 깎아 만든것이였고 장독, 김치독도 역시 나무를 파서 만든것이였다.
행군대오가 두그루의 봇나무가 서있는 만강부락의 천연대문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온다는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허락여촌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나무동이며 나무함지들에 시원한 감주며 탁배기를 담아놓고 기다리고있었다. 한 농민이 현성에 소금사러 갔다가 무송현성전투소식을 안고온 후부터 촌장은 적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는데 일본군비행기들이 자주 만강방향에 날아와 돌아치는것을 보고서는 혁명군이 자기네 마을로 찾아오는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였다는것이였다.
나는 탁배기를 한쪽박 마시고나서 촌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다들 떨쳐나서서 우리를 공개적으로 환영했다가 후환이 없겠습니까?》
《념려하지 마십시오. 봄에 혁명군이 이 고장을 다녀간 후부터 만강경찰대놈들은 우리앞에서도 설설 깁니다. 더구나 왕가대장도 녹아났다, 무송현성 왜놈들도 풍지박산이 됐다는 소식들을 듣고나서는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지요.》
그때 만강천다리목에서 한 농민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혁명군분네들, 이번에도 단스를 차주시겠지요?》
봄에 만강부락에 와서 연예공연을 할 때 훈춘내기의 유격대원 몇이 무대에 올라가서 로씨야춤을 춘적이 있었다. 쏘만국경지대에서 살아온 훈춘내기들은 로씨야노래나 로씨야춤 흉내를 썩 잘 냈다. 그 춤을 보고 눈이 둥그래진 마을사람들은 《야, 희한두 하다. 춤이란게 팔을 흔들고 어깨를 으쓱으쓱하는것인줄로만 알았더니 저것봐라, 저렇게 발루 쾅쾅 차는구만. 아무튼 그 단스란게 볼만은 하다.》고 떠들어댔다.
《네네. 단스를 차다뿐이겠습니까. 그보다 더 멋있는 구경두 시켜주지요.》
리동백이 암시한 《멋있는 구경》이란것은 연극공연을 념두에 둔것이였다.
우리는 허락여촌장네 집 웃방에 지휘부를 정하였다. 그 집은 우리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다. 10년전에 공영이 마적들에게 잡혔던 아버지를 구출해가지고 첫번째로 들린데가 바로 그 집이였다. 그때 허락여는 공영과 같이 아버지를 무송까지 호위해주었다.
나는 이 집에서 《피바다》대본작업을 계속하였다. 전국진이 희생된 뒤이고 또 후날 인민혁명군의 대내신문 《서광》을 주관하면서 그 신문에 몇편의 짧은 자작소설까지 실은바 있는 김영국이도 아직 입대하지 않은 때여서 대본작업은 만강에 와서도 어쩔수없이 내가 맡아하였다.
리동백은 대본작업에 참고를 하라고 조국에서 발행되는 여러종의 신문, 잡지들과 단행본들을 무시로 구해다주었다.
나는 그 출판물들의 덕으로 국내에서 벌어지고있는 정치적사변들과 사회경제형편, 문학예술계의 실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할수 있었다.
당시의 진보적인 문학예술운동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대체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부터 민족적인것을 옹호고수하고 발전시키려는 애국애족적인것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일제통치시기 우리 나라의 진보적문학은 애국애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으로 인민들을 계몽하며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무용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예술들의 발전방향을 유도하고 거기에 담겨져야 할 내용들을 제시해주는데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경향파》문학이라고 불리운 진보적작가들의 문학운동은 1925년에 이르러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을 낳았다. 《카프》가 창립된 때로부터 조선의 진보적문학은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리해관계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리기영, 한설야, 송영, 박세영, 조명희를 비롯한 우수한 《카프》작가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단에서는 《고향》, 《황혼》,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산제비》, 《락동강》 등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어떤 작가들은 서울 종로네거리에서 팥죽장사를 하여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인민의 정신적량식이 되고 길잡이가 될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써냈다.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를 위협하는 화약으로 되였다.
《카프》작가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에는 언제나 사상범탄압에 혈안이 되여 돌아치는 일본군경들과 정보원들의 검은 마수가 따라다니였다. 그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적들은 올가미를 더 악착스럽게 조이였다. 두차례에 걸치는 검거선풍으로 하여 《카프》는 비참하게도 창립 10돐이 되던 1935년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가 강요하는 《국민문학》(전향문학)을 하느냐, 붓을 아주 꺾어버리고마느냐 하는 기로에서도 대부분의 《카프》출신작가들은 진보적문인으로서의 량심을 지키였다. 리기영은 내금강의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부대기농사를 지으면서도 조국과 민족을 끝없이 사랑하는 량심적인 지성인, 애국적인 작가로서의 체모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설야나 송영도 역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해가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카프》를 해산할수 있었지만 조선문학의 시종일관한 저항정신과 애국애족의 터전에서 싱싱하게 싹트고 자라온 그 문학의 명맥은 도저히 끊어버릴수 없었다.
《카프》출신의 문인들이 감옥에 끌려가거나 산간벽지로 쫓겨가고있을 때 항일혁명대오안의 지식인들과 함께 북부국경지대의 작가들과 중국본토의 적색구역, 사회주의쏘련에서 활동하던 우리 나라의 망명작가들은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위업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참신하고 전투적인 혁명문학을 창조하였다.
그들은 백두의 험산준령과 만주광야에서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고있는 항일투사들을 민족의 총아로 높이 내세우고 찬양하면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아낌없이 표시하였다.
후날 《인간문제》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녀류소설가 강경애는 룡정에서 간도인민들의 원군운동을 형상한 《소금》이라는 중편소설을 썼다.
시인 리찬과 김람인이 국경지대에서 벌린 창작활동은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리찬은 우리가 서간도에 나온 후 압록강대안인 삼수와 혜산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끝없는 동경심을 담아 《눈내리는 보성의 밤》과 같은 훌륭한 서정시들을 써냈다.
김람인은 우리가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건한 그해 11월 림강대안인 중강진에서 표지에 붉은 기발을 그려넣은 동인문예잡지 《시건설》을 창간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동경하고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혁명적인 시들을 많이 창작발표하였다. 그는 자기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도 2, 000부나 찍어 우리에게 보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성과에 고무되여 참군을 시도한 작가들도 있었다. 소설가 김사량은 참군을 결심하고 만주광야를 헤매다가 우리 부대를 종시 찾아내지 못하고 연안에 가서 장편기행문 《노마만리》를 썼다.
새 조국 건설시기와 반미대전시기 우리 문단에서 창작된 《백두산》, 《뢰성》, 《조선은 싸운다》, 《강철청년부대》등의 성과작들이 광복이전에 혁명조직에 인입되여있었거나 참군을 지향했던 문인들에 의해 창작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무장대오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총을 잡은 심정으로 펜대를 굳게 틀어잡고 민족의 계몽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 이런 작가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해방직후 짧은 기간에 조선사람의 구미에 맞는 새 문화를 빨리 건설할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애국적예술인들과 선각자들은 일본도 영화업을 발전시키고있는데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영화를 못 만들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영화를 꽝꽝 만들어서 민중을 위해 봉사하자, 그리고 영화예술에서도 자립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세계만방에 시위하자는 배심을 가지고 영화예술건설의 간고한 초행길을 개척해나갔다. 라운규를 비롯한 량심적인 예술인들은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적향취가 강한 영화들을 제작하여 우리 나라 예술인들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오르던 때였다.
바로 이 시기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무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있었다. 극장무대에 성악작품, 기악작품, 화술작품이 오르는 례는 있어도 무용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들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작품들을 창작해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뿐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서간도로 진출하고있을무렵에 국내에서는 일장기말소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그 소식이 백두산밑에까지 날아왔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 된것은 신문 《동아일보》가 1936년 8월에 베를린에서 있은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종목의 1등수상자인 손기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의 앞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것이였다.
노발대발한 총독부당국은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고 그 관계자들을 구금하였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손기정의 경기성과와 일장기말소사건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들은 강연을 듣고 《동아일보》편집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립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였다.
《피바다》대본이  다 되자  나는 그것을 《대통령감》에게 보이였다.  대본을 읽고난 《대통령감》은 이거면 됐다고 하면서  원고뭉치를 들어 공중에 휘젓고는 그대로  밖으로 달아나버리였다.
만강에서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 있었던 몇가지 삽화적인 이야기들은 전적지답사기나 회상기들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많이 소개되였다. 그 글들에는 기억이 삭막해져서 정확성을 기하지 못했거나 아예 망각해버린 사실들이 더러 있는것 같다. 특히 리동백의 수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것이 유감이다.
자진하여 무대감독을 맡아나선 《대통령감》에게는 배우선발에서부터 난관이 제기되였다. 《토벌대장》역을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론의를 거듭하다가 성미가 콸콸한 리동학중대장에게 억지다짐으로 떠맡기였다. 을남의 어머니역은 장철구에게 갔다가 김확실에게로 넘어갔고 갑순의 역은 김혜순에게 분담되였다. 《토벌대장》역 못지 않게 리동백을 딱하게 한것은 갑순의 동생 을남이의 역선발이였다. 10살안팎의 나어린 소년의 역이였는데 우리 부대에는 그런 역에 합당한 체소한 인물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 역은 만강부락의 아이를 데려다 시키였다.
《대통령감》은 연출작업에서도 많은 고충을 겪었다. 원래 그가 연기형상을 지도하면서 제일 걱정한것은 을남이의 역을 맡은 만강의 어린이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 산골내기 어린이가 연출가의 의도를 제일 민감하게 포착하는것이였다.
그 대신 어른들의 연기가 잘되지 않아서 리동백의 애를 말리였다. 거의 모든 연기자들이 무대에만 나서면 몸가짐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였다.
눈썰미가 빠르고 다정다감한 김혜순조차도 정작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눈살이 꼿꼿해지고 말도 별스럽게 하였다. 울어야 할 대목에 가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군 하였는데 리동백이 달래기도 하고 추어주기도 하고 화까지 내면서 별수를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자기의 기량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매번 지적을 받군 하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리해가 가지 않는 일이였다. 그는 어린시절에 학비가 없어 학교에도 온전히 다니지 못하고 학교울타리밖에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글과 노래를 배운 녀성이였다.
나는 김혜순에게 그가 조국과 간도에서 실지로 체험한 일들을 하나하나 상기시켜주면서 이 연극은 바로 동무같은 사람들이 겪은 생활을 엮은것이다, 왜놈들이 쏴죽인 을남이는 동무의 친동생이다, 생각해보라, 방금전까지 누나, 누나 하던 동생이 무참히 쓰러졌는데 왜 누나의 가슴에서 원한의 피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고 말해주었다.
김혜순의 연기는 그 순간부터 일변되였다.
나는 리동학도 되게 닦아세웠다. 그가 《대통령감》에게 자기는 차라리 《토벌대장》몇놈을 잡아오라면 잡아왔지 그런 놈들의 흉내는 입이 더러워질가봐 안내겠다고 선언하였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그에게 《토벌대장》역을 잘하는것이 리동학의 전투과업이라고 두번다시 투정질을 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놓았다.
총과 배낭밖에 메고온것이 없는 우리 유격대원들이 순식간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세우고 생전 본적이 없는 연극을 펼쳐놓게 되자 만강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들은 무대우에 자기들이 겪어온 생활과 꼭같은 생활이 펼쳐지자 가슴을 움켜쥐고 연극의 세계에 끌려들어갔고 나중에는 갑순이와 함께 울고 어머니와 함께 부르짖었다. 한 로인은 지금 자기가 연극을 본다는것도 잊고 무대에 뛰여올라가 을남이를 쏘아죽인 일본군 《토벌대장》역을 맡은 리동학의 이마를 장죽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연극 《피바다》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그날 만강사람들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그날 밤만은 자정이 훨씬 지날 때까지 등잔불밑에서 연극을 본 소감을 나누었다. 어떤 집들에서는 여럿이 모여서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도 그날 밤에는 밤이슬을 맞으며 오래도록 마을길을 거닐었다. 공연에서 받은 인상을 주고받으며 기쁨에 겨워 술렁거리는 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숨결소리를 들으니 잠이 도무지 오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비상한 예술의 힘앞에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만강에서 한 연극공연은  너무나도 소박한것이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그 소박한 작품을 보면서  모든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가슴도 쥐여뜯고 손벽도 치고 발도 구르는것이였다.
나는 그때 만강마을의 소로길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에 잠기였다.
(우리가 만일 여기서 공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을가. 허락여촌장이 말한것처럼 아마 초저녁부터 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잠을 청하고있거나 꿈나라로 갔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도 만강의 집들에서는 등잔불이 타오르고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마을에 등불을 가져다준셈이 아닌가. 우리가 이 마을에 100마대의 쌀을 메다준들 저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흥분할수 있겠는가.)
만강에서의 연극공연은 두메산골 까막눈이던 젊은이들, 늙은이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여 항일혁명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로, 후원투사로 개변시켰다. 그때 수많은 마을청년들이 무대에 뛰여올라와 참군을 열렬히 청원하였다. 만강은 수많은 참군자를 배출한 고장의 하나로 되였으며 우리의 믿음직한 후방보급기지의 하나로 되였다.
그 연극이 만강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가 하는것은 20여년이 지나서 혁명전적지답사단이 만강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곳 사람들이 공연을 한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상세한 줄거리, 지어 일부 대사까지 생생히 기억하고있더라는 사실만으로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혁명군의 사상과 정서는 《피바다》의 공연무대를 통하여 사람들의 뇌수와 심장과 페부에 만강천의 물처럼 풍만하게 흘러들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항일혁명시기의 예술은 암흑을 불사르는 등불이라고도 할수 있었으며 사람들을 투쟁의 길로 부르는 북소리라고도 할수 있었다. 우리가 예술활동을 가리켜 《북대포》라는 말로 표현한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한것이였다.
나는 현대예술도 그와 꼭같은 사명을 지니고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참다운 사상과 참다운 도덕, 참다운 문화를 주는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기본사명이다.
우리 사람들이 정말 재간이 있었다. 따지고보면 예술이 비록 고상한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신비스러운것은 아니다. 사실이 말해주고있는바와 같이 인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의 향유자일뿐아니라 참다운 창조자이다.
연극 《피바다》공연은 유격대원들을 사상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잘 준비시키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나는 해방직후 우리 집으로 찾아온 작가들에게 만강에서 벌린 예술활동에 대한 생각을 더듬으면서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우리곁에 전문작가나 예술인들이 없는것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스스로 곡도 짓고 대본도 쓰고 연출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주인이다, 당신들이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서 새 조선 건설에 일떠선 인민들을 고무해주라고 말해주었다.
실로 한편의 훌륭한 시나 연극이나 소설이 천만사람의 가슴을 격동시키며 혁명적인 노래는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적의 심장을 꿰뚫을수 있다는것은 항일혁명시기의 문학예술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진리이다.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는 과정이란 혁명사상에 공명하게 하고 감동시키는 과정이라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데서 가장 힘있는 수단의 하나로 되는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나는 언제인가 일본의 이름난 성악가이며 참의원 의원이였던 오다까 요시꼬(리향란)에게 인간생활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응당 생활이 있어야 하고 생활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예술이 있어야 한다. 예술이 없는 세계를 어떻게 인간세계라고 할수 있으며 예술이 없는 생활을 어떻게 인간생활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사람들에게 늘 문학예술을 사랑하라고 말해왔고 또 온 나라 대중에게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할줄 아는 인간이 되라고 말하고있다.
우리는 이 땅에 만민이 춤추고 노래부르는 세계적인 예술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만강의 소박한 가설무대에서 광솔불과 남포등을 켜놓고 《피바다》를 공연할 때 품었던 절절한 소원이였고 꿈이였다.
지금은 전국도처에 수백수천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극장, 영화관, 문화회관들이 번듯하게 꾸려져있다. 한개 도에서 하나씩 예술대학도 운영하고있다. 나는 우리의 후대들이 이런 전당들에서 자기의 선대들이 채 부르지 못한 노래를 마음껏 부르며 백두산의 향취가 그대로 풍기는 예술을 끊임없이 창조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고유한 우리 말로 《피바다》라고 하지만 그 극작품의 본래이름은 《혈해》였다. 《혈해》가 만강에서 공연된 후 그것을 본 사람들, 그 연극공연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혈해가》라는 이름도 붙이고 《혈해지창》이라는 이름도 달아 공연활동을 계속하였던것 같다. 그러는 과정에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이름도 조금씩 달라지고 어떤 고장에서는 자기들에게 더 가까운 생활소재를 바꿔넣기도 한 모양이다.
우리는 그때 《피바다》에 이어 《한 자위단원의 운명》도 무대에 올리였다. 그 연극에는 《피바다》창조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유격대원들이 경쟁적으로 출연하였다.
해방후 우리 작가, 예술인들은 만강에서 공연한 작품들을 다 발굴하였다.
김정일조직비서는 우리가 항일혁명시기에 창작한 극작품들을  우리 나라 혁명연극과  혁명가극의 시조로,  시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영화와 소설,  가극과 연극으로 옮기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그 과정에 우리가 만들어낸 원작들에 기초하여 혁명영화,  혁명소설, 《피바다》식가극, 《성황당》식연극이 창조되고  항일유격대식예술활동방식이  새롭게 수립되였다.
《피바다》가 처음으로 영화화면에 옮겨져 나왔을 때 나는 만강의 소박한 가설무대에 걸었던 남포등과 함께 멍석우에 앉아 웃으며 울며 어쩔줄 몰라하던 그 고장 사람들이 생각났다.
만강에서 우리가 《피바다》를 공연할 때 공연성과를 열광적으로 축하해주던 그 잊을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한번 보고싶다. 반세기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늙은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겠지만 나의 동년배들과 아이들은 더러 만강에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 을남이의 역을 맡았던 그 아이도 살아있다면 60대의 로인이 되였을것이다.